이번 주가 ~밀린 글 해치우기 주간~ 이라서 일단 그 첫타자로 쓴,
무려 작년(!)에 마창 내기로 써주기로 했던 밸슷밸입니다.
밸이 당시 리퀘했던 내용은 밸의 남자다운 모습에 두근거리는 슷이었지만 그런 거 없ㅋ다ㅋ
사실 저 내용으로는 영 삘이 안 오기에 그냥 밸슷밸로 쓰면 안 되겠냐고 부탁해서 허락 받았음.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도 정말 괜찮은가 ㅋㅋㅋ 일단은 밸이 낸 회지 내용이 기반입니다만...
그 주제에 너무 내 해석의 밸슷밸이라서 면목없고 길원들을 많이 출연시킨 건 좀 뿌듯함.
왠지 제비백숙 쓸 때랑 비슷한 감성으로 써버린 것도 같지만... 에이, 그거보다는 훨씬 라이트하지.
마비노기나 저희 길드 모르시는 분도 단편 러브 코미디 정도로 여기고 보시면 좋을 듯 ^.^...
여튼 소설란에 올리기 뭣한 잔소설은 앞으로 이쪽에 올라옵니다.
오후 1시 이전,
소년은 프러포즈에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오후 1시,
망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밸은 28번째로 그 생각을 하며, 달렸다. 던바튼 감자밭에서부터 두갈드 아일, 두갈드 아일에서 소용돌이
언덕까지, 아무튼 있는 힘껏 달렸다. 누군가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달렸다. 달리기를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달린다. 달리는 거다. 나는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흐어어어어어ㅓ어엉ㅓㅓ어엉어헝!!!”
밸은 절규했다. 우렁차지만 흡사 짐승의 소리 같은, 괴성에 가까운 그 절규는 그의 뜀박질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 언덕 가득 메아리처럼 울려댔다.
오후 1시,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슷이 중얼거렸다. 마침 옆에 있던 하이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슷?”
“밸이 도망갔어.”
“……밸이?”
하이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 차이가 나는 소꿉친구처럼 늘 붙어 다니는 슷과 밸이었지만, 사실 누나인 슷이 밸을 장난감이나
다름없이 가지고 놀며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관계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순둥이 같은 밸이 늘 참거나
당해주곤 했는데,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 밸이 도망을 다 갔지. 슷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치마
같은 옷을 입은 밸에게 아이스케키? 뱀 잡아와서 쫓아다니며 겁주기? 낚시대를 채찍마냥 휘두르며 여왕님 놀이? 예상 답안으로 평소
슷이 잘 치던 종류의 장난을 하나씩 떠올리며, 팔짱까지 낀 하이가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말해봐, 슷. 이번에는 또 무슨 장난을 한 거야?”
“별로…….”
슷이 곤란한 듯 뺨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냥…… 프러포즈 했을 뿐인데.”
“뭐?”
하이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온갖 예상 답안을 다 떠올린 하이였지만 이런 대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러포즈로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프러포즈로 사람을 괴롭혔다…… 이 말인가?
과연 슷. 상식을 뛰어넘는 오징어로구나. 무서운 아이…!
오후 2시,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밸은 소용돌이 언덕 정상에 웅크리고 앉아 41번째로 그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손에 호미가 쥐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웬 호미…… 아차, 나 성당 알바 중이었지.”
그래, 그저 성당 알바 중이었을 뿐이었는데…… 해가 중천에 뜬 대낮,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는 데에 여념이 없는 자신을 슷이 대뜸 부르더니 대뜸 말했다. 밸, 결혼하자!!!
“……으.”
그
순간을 떠올리자 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슷은 도대체 왜 그런 장난을…… 아무리 슷이라 해도 도가 지나치다. 원래도 진지한
구석이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슷이긴 하지만…… 아니, 충분히 칠 수 있는 장난이긴 하지. 슷은 자신을 어린아이로밖에 안
보니까. 자신의 마음 따윈 추호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런 건 그냥 장난이잖아? 분명히 장난일 거야. 평소랑 다를 바 없는
그냥 그런 장난. 그런 거에 놀라서 도망까지 치다니…….
밸은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가서 만나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겠지. 고작 이런 일에 겁을 먹고 도망쳐서는 어쩐단 말인가. 돌아가자, 밸. 너는 남자다. 그러니까…!
“……이따가 가자.”
밸은 다시 웅크려 앉았다. 무서운 걸 어쩌겠는가. 아무리 남자라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예요. 특히 슷 무서워, 슷. 나 슷이 무서워요…….
“……으흑…….”
밸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는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그러다 정확히 5분 후 또 결연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자!!”
그래봤자 1분도 안 돼서 도로 앉을 것이다. 벌써 29번째 반복 중인 동작이었다.
오후 2시.
여자들끼리의 비밀스러운 회의가 열렸다. 멤버는 슷과 하이, 마침 근처에 있던 지유와 리프였다. 타닥 하는 모닥불의 빛이 캠프 안을 일렁이듯 은은하게 밝히는 가운데, 생각에 잠겨 있던 하이가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장난이 아니라고?”
“당연하지!!!”
슷이 13번째로 발끈했다.
“누가 프러포즈를 장난으로 하겠어?!”
“……하지만 슷, 밸 좋아했어? 늘 괴롭히기만 했으면서…….”
“괴롭힌 거 아냐!! 같이 논 거라고!”
“……누가 봐도 괴롭히는 걸로 보였는데…….”
“그야, 밸을 가만 놔두면 어쩐지 건드리고 싶어지잖아?”
“……그간의 그게 다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초딩의 심보였단 말인가…….”
“그럼 슷은 밸을 정말로 좋아하는 거야?”
“당연하지!!”
“진심이야?”
“물론!”
반복되는 질문에 슷이 기어이 짜증을 냈다.
“다들 왜 그래? 당연히 좋아하니까 프러포즈하는 거잖아?! 안 그러면 왜 프러포즈 같은 걸 하겠어??”
“……아, 그렇지만 슷은 왠지 그런 상식과 동떨어져 보여서…….”
“게다가 밸은 슷에 비해서 너무 어리고…….”
“클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지금도 그렇게 귀엽고 멋진데!! 크는 동안 누가 채가기라도 하면…!”
“……아니, 점눈이 멋져 봤자지.”
지유가 옆에서 핀잔했다.
“과연, 그런 생각에 급 조급해져서 급 청혼을…….”
하이가 옆에서 분석했다.
“하지만 슷, 일반적으로 해가 중천에 떠있는 한낮에 감자밭 한가운데에서 호미질을 하는 상대에게 청혼하지는 않아. 그런 식이면 보통은 장난이라 받아들인다고.”
리프가 옆에서 조언했다.
“밸은 그때 뭐하고 있었대?”
“감자 캐고 있었대.”
“호미질 하다가 청혼 받은 남자인가…… 희귀한 경험했네.”
“근데 도망은 왜 친 걸까?”
“놀란 거 아냐?”
“아니, 분명히 장난이라고 생각했을 걸.”
“왜 내 청혼을 장난이라 생각해?”
“아까 리프도 말했지만, 방법부터가 완전 틀렸다니까.”
“이런 건 역시 무드가 중요해.”
“이벤트지!”
“그럼, 이벤트처럼 꾸며서 무드를 잡고 다시 한 번 도전해보면 어때? 우리도 도와줄게!”
“오, 그거 좋다! 재밌겠다!!”
“나도 찬성! 하자하자!!”
그렇게 네 여자가 머리를 맞댄 캠프 안에서, 밸을 더욱 무섭게 할 일이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오후 3시,
근심 어린 표정의 밸이 비틀거리며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는 그의 혼란스럽고 지친 정신 상태를 표현함과
동시에, 고민하며 앉았다가 일어났다를 하도 많이 해 힘든 육체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 상태로 힘없이 길을 걷던
밸은,
“저거 잡아!!!”
갑자기 나타난 지유와 리프에 의해 붙잡혔다. 워낙 작은 밸인지라 두 여자의 힘만으로도 금세 제압당하고 번뜩 들렸다. 지유와 리프는 밸을 들쳐 메고는 달려, 성당 앞에 도착해 문을 벌컥 열어 재끼고는 밸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악!!”
충격에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밸이 겨우 그를 추스르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밸의 눈앞에는 불을 밝힌 초가
쭉 놓인 환한 길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슷이 있었다. 환하고도 수줍게 미소 짓는 슷. 그런 슷이, 조금씩 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스, 슷…….”
“……밸…… 아침에는 미안했어. 내가 너무 무드가 없었지?”
“……슷……. 아냐, 난…….”
“밸, 이제 진지하게 말할게. 있지…….”
밸 앞에 선 슷이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대뜸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내 아를 낳아도!!!”
밸은 기겁했다.
“헉…!!”
놀란 밸이 뒷걸음질을 치다 옆에 놓인 선물 상자를 발로 걷어찼다. 상자가 휭 공중으로 날아가며 속에 든 것이 쏟아져 내려왔다. 마치 우박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마치 하나하나가 춤추듯 나풀거리며 내려오는 그것은,
오징어 다리였다.
“헉, 내 예물이!!!”
오징어 다리를 맞으며 슷이 절규했다.
“예물?! 오징어 다리가?!”
“이게 예물이라고?!”
“이런 건 도대체 언제 준비한 거야?!”
밸이 황망히 오징어의 비를 맞고, 지켜보던 하이와 지유와 리프가 경악하며 한 마디씩 하는 와중,
“밸한테 선물로 주려고 그간 오징어 먹을 때마다 몸통만 먹고 아껴둔 건데!!!”
슷은 계속 절규했다. 그리고,
“……큭, 이건…!”
“오, 오징어 타는 냄새다!!”
오징어 다리가 촛불 위에 떨어졌는지 오징어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성당 안에서 웬 소란이…….”
타이밍 좋게 성당 안에 들어선 크리스텔 사제가, 그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아, 아니…… 여러분, 이게 다 뭐죠?!”
프러포즈. 슷의 첫 번째 프러포즈는 감자밭 한가운데에서. 슷의 두 번째 프러포즈는…… 오징어 냄새. 오징어, 오징어라니…!!
“……이건, 이건 아냐!!!”
뒷걸음질을 치던 밸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밸!!!”
슷은 도망치는 밸의 뒷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하게 서있었다. 아니, 서있는가 싶었다.
“……밸,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어!!!”
슷은 욱해서는 밸을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쪼…… 쫓아!!”
하이와 지유와 리프가 그 뒤를 쫓았다.
“성당 안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도망치다니!!!”
덤으로 크리스텔 사제가 그 뒤를 쫓았다.
오후 4시,
던바튼 마을에서는 기가 막힌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망치는 밸까지는 괜찮았다. 작은 몸집의 밸은 여기저기 숨어 다니며
다람쥐처럼 잽싸게, 귀신처럼 빠르게 도망 다니고 있었다. 문제는 슷이었다. 목표물을 향해 전진하는 야생마처럼, 사냥감을 향해
달려드는 맹수처럼 밸을 쫓는 슷의 질주본능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너무 거리낌이 없어 질주에 방해되는 것은 모조리 밟거나 걷어차거나
꿰뚫고 다녔다. 덕분에 슷이 지나간 곳마다 사고가 끊이기 않았고 사고의 피해자 역시 끊이지 않았다.
피해자 1, 식료품점 글리니스 씨.
“우리집 식료품들을 다 걷어차 버리고 도망치다니!!!”
피해자 2, 잡화점 발터 씨.
“우리 아이라에게 줄 치즈 케이크를 밟고 도망치다니!!!”
피해자 3, 의류점 시몬 씨.
“나의 엘레강스한 물레와 베틀을 부수고 도망치다니!!!”
피해자 4, 모험가 조합 에반 씨.
“밤을 새워 결제를 마친 서류들을 날려버리고 도망치다니!!!”
피해자 5, 힐러집 마누스 씨.
“내 소중한 약물 콜렉션을 깨버리고 도망치다니!!!”
……등등 그들의 추격전이 계속 되면 될수록 피해자가 속출했고 그 추격전에 가담하는 사람도 늘어만 갔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그 선두에서 도망치며, 밸은 이제 몇 번째인지조차도 모를 절규를 하고 또 했다.
오후 5시,
“길드로 민원이 또 들어왔어!!!”
길드홀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비퍼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도대체 이 바보들이 뭐하는 짓이지?!”
서류를 받아든 운류 역시 골치가 아픈 건 마찬가지인 듯 미간을 찌푸렸다.
“프러포즈라는군.”
“프러포즈?!”
비퍼가 어이가 없다는 듯 창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추격전이 프러포즈라고?! 저런 프러포즈가 세상에 어디 있어?!”
운류가 설명했다.
“슷이랑 밸이잖아.”
비퍼가 납득했다.
“아, 슷이랑 밸이구나…….”
조금 표정이 풀어진 비퍼가 창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슷이나 밸이나, 서로에게 마음에 있는 것이 확실한데 어째서 저런 짓을 하는지.”
“아직 어리고, 서투니까.”
운류가 잔잔히 미소했다. 그를 마주 본 비퍼는 회상했다. 그들에게도 어리고 서툰 시절이 있었지. 이윽고 덩달아 잔잔한 미소를 띤 비퍼가, 쓰게 웃었다.
“그래, 아직 애기들이지. 하지만 그걸로 저렇게 주변에 폐를 끼쳐버리면, 귀여우니까~ 하고 넘어갈 수준이 아닌 걸?”
“물론 길드로 민원이 들어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지. 이제부터 길드에서도 추격전에 가담한다. 더 이상 추격자가 늘기 전에 반드시 생포해서 사건을 정리하지 않으면…!”
결연히 말한 운류가 일어서는데,
“쉽지 않을 걸.”
그때까지도 주변의 소동에는 아랑곳도 없이 소파에 누워 낮잠 삼매경에 빠져있던 까만 소년이 심드렁히 말했다. 그쪽을 바라본 운류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냐, 레바엔.”
“목표물이 밸이란 말이야. 오랜 시간 슷과 함께 다닌 덕분에 도망에는 도가 튼 녀석이거든. 아무리 많은 사람이 쫓는다한들 저 녀석이 진심으로 도망치고자 마음을 먹은 이상 쉬 잡을 수 없을 걸.”
“그래서, 무작정 쫓는 거 외에 딱히 좋은 수라도?”
“…….”
잠시 멍하게 있던 레바엔은 몸을 쭉 늘려 기지개를 펴고는 돌아누웠다.
“뭐, 별로. 수고해.”
“……그러지.”
잠시 그를 응시하다 돌아선 운류가 비퍼와 함께 길드홀을 빠져나갔다.
오후 6시,
밸은 여전히 도망치고 있었다. 이젠 뭐 때문에 도망치기 시작했던 건지 밸조차도 가물가물할 수준이었다. 그저 미친 듯이 쫓아오는
추격자들의 모습에서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잡히면 죽는다!! 절대로 죽는다!! 밸은 미친 듯이 도망쳤다.
“……과연. 저래서는 절대로 못 잡겠는걸.”
운류와 비퍼는 건물 옥상에서 요리조리 잽싸고 빠르고 도망치는 밸을 지켜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은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비퍼가 어떤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앞으로 5분 후, 밸의 도주 예측 지점은 저곳!! 운, 저기로 착지를 하며 동시에 발구르기를 시전해줘!!”
“알았어!!”
달리던 운류가 그대로 힘을 실어 땅을 박차 도약했다. 쾅!!! 자이언트의 거대한 발에 힘과 체중이 실려 지면을 차자 그 주변에는 지진 같은 진동이 일었다. 그 요동에 도망치던 밸이 비틀거렸다.
“지금이다, 비퍼!!”
“알고 있어!! 받아라, 밸!!”
날아와 착지해 밸의 앞을 막은 비퍼가 실린더를 앞으로 내밀어 라이프 드레인을 시전했다.
“……윽!”
라이프 드레인에 잡힌 밸의 발이 꽁꽁 묶인 듯 느릿해졌다. 더는 달리지도 못하고 스킬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밸이 괴로운 신음을
뱉었다. 물러서 라이프 드레인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봤자 뒤로는 추격자들이 달려오고 있다. 영락없는 독안에 든 쥐였다.
“이제 끝이다, 밸!!”
“……크윽!”
뒷걸음을 치다 이를 빠득 간 밸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그 순간,
쾅!!! 사방을 뒤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뒤섞인 연기가 일었다.
“이, 이건 긴급 탈출 폭탄 B…!!”
“캐쉬템을 쓰다니, 비겁하다 밸!!”
추격자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연기가 사그라졌으나, 밸은 이미 그곳에서 사라진 후였다.
오후 7시,
밸은 마을 바깥으로 벗어나 있었다. 땀으로 푹 젖어서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앞뒤로 움직여 비틀거리며
뛰고 있었다. 이제는 밸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만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뛰고 있었다. 여기서 잡히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도대체,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슷…….’
슷을 떠올리자 불현듯 설움이 복받쳤다.
슷이 자신을 어린아이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과 슷이 함께 걸어가면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쑥덕대거나
키득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자치곤 큰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보이쉬한 얼굴의 슷과, 또래치고도 작은 키에 어딘가의
도련님처럼 하얗고 뽀얀 피부, 여자애처럼 곱상한 얼굴의 밸.
그래서 밸은, 슷과 나란히 서도 우습지 않을
정도로 크고 듬직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우유를 토할 정도로 마셔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까매지고 싶어서 썬텐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서 이 낯선 곳에서 자리를 잡고, 돈도 많이 벌고, 커다란 집도 사고, 그렇게 슷 정도는 거뜬히
책임져줄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한 남자가 돼서. 그렇게 돼서…….
프러포즈는, 언젠가 자신이 하고 싶었다.
붉은 황혼이 지는 근사한 곳에서, 단둘뿐인 이벤트를 마련해 무드를 잡고,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근사한 반지를 사서,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근사한 모습으로, 로맨스 소설에 나올 듯한 근사한 말로 고백하고 청혼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으흑…….”
밸이 흐느꼈다. 달리며 눈물을 흩뿌렸다.
“도와줄까?”
그때 낯익은 금속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엉겁결에 돌아보니 수레에 비스듬히 기대선 까맣고 작은 소년이 있었다.
“……레, 레바…….”
“도와줄게.”
도와주겠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안도감이 솟구친 밸의 걸음이 멎었다. 그 순간,
레바엔은 냅다 밸을 걷어찼다.
“윽!!”
저항할 새도 없이 넘어가 바닥에 나뒹군 밸이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아. 그야 널 도와주는 짓이지.”
뻔뻔하게 대꾸한 레바엔이 밸의 몸을 발로 꾹 눌러 밟았다.
“윽!! 이, 이게 무슨…!”
“앗, 저기에 있다!!”
던바튼 북문으로 막 나온 추격자 중 하나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곧 뭔가가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두려움에 질린 밸이 바동거리며 애원했다.
“놔, 놔줘! 어서 도망가야…….”
“싫은데.”
레바엔은 그 애원을 간단히 거절하며 발에 더욱 힘을 줘 밸을 밟아 붙들었다. 그리곤 씩 웃었다.
“남자라면, 설령 아무리 해괴해도 여자의 프러포즈에 도망쳐서는 안 되는 거다, 쨔사.”
“……뭐?”
불현듯 멍해진 밸이 눈을 깜빡였다. 믿음직한 남자가 되고 싶었는데, 여기서 도망치면 남자조차도 아니라고?
“……프러포즈라고?”
가장 처음으로 도착한 글리니스가 밸을 잡으려다 그 단어에 한 발자국 물러섰다. 뒤이어 도착한 시몬이 의아한 듯 글리니스를 보며 물었다.
“왜 그래, 글리니스 아줌마?”
“프러포즈라는데요?”
“프러포즈? 이게 그런 엘레강스한 이유 때문이었어?”
그 뒤에 도착한 사람도 멈춰섰다.
“프러포즈?”
“프러포즈래요.”
“프러포즈 때문이었어?”
“프러포즈라니…….”
곧이어 도착한 사람들도 프러포즈라는 단어에 밸을 잡는 대신 그 주변을 빙 둘러쌌다. 프러포즈라는 단어는 마치 파장처럼 사람들 사이로 크게 번져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원으로 둘러싼 채 지켜보는 가운데, 슷이 도착했다.
추격전을 시작한지 4시간 만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슷.”
“……밸…!”
이미 도망칠 마음도 기력도 없는 밸이었지만, 실로 유감스럽게도 슷은, 아직도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상황 파악도 하지 못했다. 슷은 밸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팔을 낚아챘다.
“어?”
그와 동시에 밸의 몸이 공중을 휭 나르는가 싶더니, 쿵 소리와 함께 지면에 내려앉았다. 눈앞에 별이 번뜩였다. 하늘이 보였다. 먹먹한
통증 속에서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밸이, 곧 상황 판단을 했다. 슷이 날 엎어치기했다!!! 그리고, 하늘 위로 슷의 얼굴이
보였다.
“……밸…… 허, 헉…… 잡았다…….”
숨을 헐떡이며 그렇게 말한 슷이, 대뜸 외쳤다.
“잡았으니까…! 나랑 결혼해줘!!!”
……뭐?
“오오오!!!”
“청혼했구먼!”
“용기있는 처자일세!!”
“그래,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지!”
“미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을 때야!!”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는구먼!”
“청춘이군!!!”
“받아주게, 총각!”
“결혼해!! 결혼해!!”
사람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던지더니 급기야 박수를 치며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밸은 황망히 눈을 깜빡였다.
뭐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어메이징한 여자야.
밸은 그제야 깨달았다.
……슷, 이거 장난 아닌 거지, 진심인거지? 그럼에도 난…… 진심인 네 청혼에 난, 겁부터 먹고 도망이나 쳤는데, 그것도 2번이나 뿌리치고 죽어라
도망만 다녔는데, 네가 아무리 쫓아와도 몇 시간을 안간힘을 다해 도망쳤는데, 그런 나를 쫓고, 잡고, 하는 말이, 또 청혼이야? 넌
고민도 없어? 망설임도 없어? 자존심도 없어? 슷, 너는 도대체…….
“……하!”
거기까지 생각한 밸은 그만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 여자는 슷이지. 단순할 정도로 하나만 알고, 자신과는 달리 우물쭈물하지 않고, 쓸데없이 고민하지도 않는다. 목표가
정해지면 무식할 정도로 맹렬히 돌진한다. 그런 여자가 슷이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래서 반한 거였다.
밸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슷……,”
슷이 밸을 본다. 아니,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슷의 등 뒤가 온통 붉다. 밸은 그제야 황혼이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오부터 시작해 황혼이 내릴 때까지, 그야말로 온종일 도망 다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곳이 감자밭임도 깨달았다.
그렇게나 도망쳤는데도 겨우 이곳, 일이 시작된 처음으로 돌아와 버렸다는 것을.
두 사람의 세 번째 프러포즈는 최악으로 엉망이었다.
도망쳐 다닌 밸도, 쫓아다닌 슷도 엉망이었다. 두 사람 다 땀과 흙먼지로 뒤범벅이 돼 볼품없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렇게나 뛰어 다녔는데 두 사람의 몸에서는 아직도 오징어 탄 냄새가 나고 있었다. 게다가 감자밭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둘뿐이기는커녕 온 동네 사람들과 전 길원들이 다
몰려나와 있었다. 낭만이고 무드고 로망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밸은, 엎어치기 당했다. 엎어치기 당해서 감자를 깔아뭉갠 채
누워있었다. 등이 얼얼하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상태로, 밸은 입을 열었다. 간신히 대답했다.
“……좋아.”
아무튼 황혼이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오오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환호했다.
“받아줬구먼!!”
“잘 됐네!!”
“축하하네!!!”
“경사로세!!”
“한 잔 하세!!”
다들 환호하며 박수를 쳐댔다. 자신이 왜 그들을 쫓아왔는지는 다들 잊은 지 오래였다.
10년 후,
……
라는 이야기를, 딸에게 밸은 들려줬다. 지금의 밸은 슷 정도로 큰 키의, 여전히 말랐어도 넓은 어깨의 꽤 듬직한, 에린에서 자리
잡아 멋진 집을 가진, 슷을 포함한 여섯 식구를 거뜬히 부양하는 믿음직한 아빠가 돼 있었다. 그런 아빠가 해주는 이야기를 또랑또랑한 눈으로 다
들은 밸의 딸은, 주저도 없이 단박에 감상을 말했다.
“……우와…… 아빠, 멋대가리 없어.”
밸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흐, 흐흑…… 아, 아빠도 알아…… 흐흐흑…….”
오늘도 또 울었다.
#.
뒷이야기.
밸은 슷의 프러포즈에 대답하고는 곧장 기절. 슷은 자신이 밸을 엎어치기 한 건 생각하지도 않고 레바엔이 밸을 발로 차고 밟았기 때문이라 여겨 레바엔을 한 대 쥐어 팸. 사실 서너 대 더 때리고 싶어했던 거 같지만 한 대 맞은 레바엔이 잽싸게 도망가서 더 팰 수 없었음.
이 커플은 결혼할 때 싱난 슷이 밸을 공주님 안기해서 입장함. 물룽 신혼방에 들어갈 때도 ^.^...
그리고 이 밸과 슷의 딸이 밑에 나온 알로. 밸과는 달리 당차고 똑 부러진 아가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