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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은 몰섭 길원인 알로 애니화. 문득 흑발적안인 아가씨가 격하게 그리고 싶어져서 ^q^;;; 다 그려놓고 생각해보니 지금은 벽안이었던 거 같지만 뭐 어때. 다 그려놓고 보니 누군가를 닮은 거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 모르겠음. 샤나인가? 샤나인가??? 알로는 딱 레바엔 여체화처럼 생긴 아가씨입니다. 거대한 빅헬름을 쓰고 나타났기 때문에 처음엔 여캐인 것도 몰랐다가 그것을 벗자 레바엔이랑 똑 닮은 얼굴의 아가씨가 있어서 뻥져있었지... 아무튼 알로는 그런 아가씨입니다. 좀 의미 불명의 대사를 외치고 있는 거 같긴 하지만 원래 저런 아가씨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맙시다... * 몇 년간 곧잘 골골거리긴 해도 감기는 모르고 살았는데 기분 전환 삼아 혼자 꽃구경 갔다가 그만 감기를 달고 와버려서 ^q^... 시망 이게 무슨 기분 전환이야!!! 음침하게 찌그러져 있는 게 더는 싫어서 나갔다가 왔는데 결국 더 음침하게 찌그러져 있어야 했어! 암튼 하하하 코가 좀 막히긴 하지만 난 감기가 아냐 그저 감기 기운일 뿐이야 하며 현실을 외면했지만 코는 점점 더 막히고 정신은 자꾸만 몽롱해지고 급기야 열까지 나고 결국은 앓아눕고... 그래도 며칠 만에 금방 나았습니다. 아하하하하 거봐 그냥 감기 기운이었다니까 ^q^ * 어라, 텍스타일에도 테터처럼 포스트 날짜를 갱신할 수 있는 기능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네요 ㅍ_ㅍ;;; 할 수 없이 저번 근황 포스트는 삭제하고 복붙. 앞으론 근황을 모아뒀다가 한꺼번에 올려야 하나... 근황은 찔끔찔끔 쓰는 게 좋은데. 우우... 블로그툴은 이것저것 써봤지만 역시 테터가 제일 우월했던 같아요 ´_` * 저번 주 밤톨양과 만나 밤톨양이 가진 라미를 시필해본 결과 난 명확한 세필 취향☆인 것으로 판명돼서 다음 펜은 선택의 여지 없이 파이롯트를 써야겠구나! 라고 결론. (플래티넘은 이미 가지고 있고 세일러는 취향이 아니니까) 그러니 이제 더는 하이에나처럼 만년필샵을 헤매는 일은 없을 줄 알았어! 그럼에도 왜인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 거 또 보고 다시 비교해보고 재고 확인하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나, 나여... 아니, 재미없어.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두고 싶은데... 왠지, 나갈 수가 없어 ㅠㅠㅠㅠㅠ 만년필을 보다가 질리면 잉크를 보고! 잉크를 보다가 질리면 만년필을 보지! 이 바닥은 정말 개미 지옥이네요... 으으 그래도 아직은 라이트하게 만년필 한 자루, 잉크 한 병이예요. 앞으로 늘어나긴 하겠지만... 내 지름 스케줄은 이미 완벽함. 천천히, 차근차근. 다음 달 잉크를 지르고 다다음 달 파이롯트 만년필을 지르고 다다다음 달 또 잉크를 살 거임... 그리고 또 만년필을. 어때! 완벽하지! ^ㅂ^ 여튼 만년필은 사길 정말로 잘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손이 편하고, 펜 소비하며 받았던 스트레스가 없어져서 속도 편함. 여태껏 주변에서 뿜뿌가 제법 들어왔었음에도 사치라고 똥고집 피우며 안 샀던 게 후회가 될 정도...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그간 노트에 글 써놓은 걸 보면 진심으로 억울해져요. 이렇게나 많은 걸 만년필도 없이 썼다니! 혹사 시킨 손한테도 미안하지만 이걸 만년필로 썼다면 내 플래티넘쨔응은 벌써 길이 들어도 매끈하게 들었을 텐데! 물론 너는 지금도 부드러움과 사각거림의 적절한 밸런스를 갖추고 있지만...  까르네지+딥펜 조합은 역시 발색이 다르네요. (밑에 깔린) 제 노트에 만년필로 쓰면 이것보단 옅게 나옴. 게다가 제이허빈 특유의 묽은 느낌이 좀 취향이 아니라 잉크 잘못 샀나도 싶었는데 병목샷을 찍어보니 헉헉 미안하다, 루주 오페라. 내가 널 잠시나마 팔려고 생각했었더니... 여튼 잉크 이야기는 아무래도 잉크를 좀 보유하고 난 후에나 쓸 수 있을 듯 ㅍ_ㅍ... * 이번 주가 자체 지정 ~밀린 글 해치우기 주간~이라서 외전 두 편 리퀘 한 편 해치웠습니다. 리퀘랑 어나더 외전은 여기에 있고 거미의 성 외전은 소설란에 올려뒀어요. 외전 둘은 쓰기 시작한 지 꽤 됐음에도 여태 시간만 지지부진하게 끌었네요. 어지간하면 이야기 완결 낸 후의 외전 같은 건 쓰지 말아야겠어요... 괜히 완성된 이야기에 필요 없는 조미료를 끼얹어 완결 이후의 여운을 망치는 것 같아 내키지가 않으니 진도가 더욱 더딤. 여튼 보이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있어서 시작했고, 쓰다만 글이 있는 게 영 꺼림칙해서 어찌 끝까지 다 쓰긴 썼는데 잘한 짓인지는 솔직히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우스운 것이, 정말로 별 내용 없는 일상담이었는데 (...일상인가) 그래서 더 힘들었던 거 같기도 하고? 글 쓸 때도 제일 애 먹는 게 늘 일상 파트... 일상 어려워요 일상. 일상을 도대체 어떻게 재미있게 쓰는 거야 ㅍ_ㅍ... * 캐스커의 Angel Of The North 중 <머릿속 남긴 그대의 여운만으로 나는 그대를 찾아갈게요~>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나 이걸 여태
<머릿속 남긴 그대의 연막으로 나는 그대를 찾아갈게요~>로 듣고 있었...음 Orz;;; 그, 그래... 생각해보니 저 대목에서 연막이 나올
리가 없지?;;; 도대체 그대라는 놈은 뭐하는 인간이기에 남의 머릿속에 연막을 터트려?;;; 그 터트린 연막으로 그 인간을 찾아가겠다는 주인공은 또 뭐야??;;; 그리고 그런 가사를 들으며 납득하고 있었던 난 또 뭐야???;;;;;; * 요즘 토토가 새벽 4시마다 깨워대서 죽겠습니다 ´_` 아무래도 그 시간대가 토토가 외로움을 견디는 한계치인 모양... 너는 왜 클수록 응석이 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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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완결 이후의 이야기 하나. 이야기가 끝난 후의 츠뮤, 츠키에테, 레바엔. 이 세 사람의 관계를 한 번 정도는 써보고 싶었어요. 물론 늘 이렇게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아마도) 쓰기 시작한 지가 1년은 넘은 거 같은데 겨우 다 썼네요. 별 내용도 아니건만 왜 이리도 오래 끌었던가. 사실 어디 올린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니 굳이 다 쓸 이유는 없었지만 ´_` 쓰다 만 글이 있는 게 찝찝해서... 당연히 네타 듬뿍이니 안 보신 분들은 패스하시고... 본편 볼 생각 없는 분은 그냥 보셔도 되고 ㅎㅎ 이곳은 전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 여기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듯 사방은 피비린내로 가득하고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귀 따가울 정도로 울려댔다. 던전 바닥에는 그들이 부숴놓은 스켈레톤들이 가득 쌓여 뒹굴고 있었고, 또 그만한 숫자가 떼로 몰려와 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가히 전장이나 다를 바 없었고, 그것도 그 어느 전장보다 무서운 전장이었다. 그리고 이 전장의 가장 무서운 점이 무엇인가 하면,
“악! 너 이 새끼, 이건 진짜 작정하고 그런 거지?!”
적은 물론 동료조차도 서로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츠키에테의 칼에 베인 상처 탓에 피범벅이 된 팔을 손으로 감싸며 레바엔이 악악거렸다.
“천만에. 도와줬을 뿐이다.”
레바엔 곁에 있던 스켈레톤을 발로 걷어차 멀리 보내며 츠키에테가 씩 웃었다. 실로 진심이 절절히 깃든 표정이라 레바엔은 울화통이 터졌으나 이제는 대꾸하기조차 지겨웠다. 사실 울화통을 터트릴 처지가 못 되었다. 그 얄미운 면상에도 이미 레바엔이 실수로 스치는 척 길게 그어놓은 상처가 있으니까. 벌써 몇 번이나 주고받은 대사였고, 상황이었다. 애당초 이 상황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허구한 날 얼굴만 봐도 으르렁대는,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워도 시원치 않을 사이인 두 남자가 함께 힘을 합해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니.
“젠장, 진짜 못 해먹겠네!!!”
레바엔이 짜증을 내며 덤벼드는 스켈레톤에게 힘껏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츠키에테를 윽박질렀다.
“네놈에게 여기를 돌파할 생각이 있긴 한 거냐?!” “그 질문, 네놈에게 돌려주마.”
츠키에테 역시 힘껏 검을 휘둘러 스켈레톤을 부서트렸다. 레바엔과 마찬가지로, 다분히 짜증이 깃든 동작이었다. 레바엔은 다시 분통을 터트렸다.
“애초에 어째서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드물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군.” “그래, 솔직히 네놈과 같이 여기를 돌파하기보다는 그냥 여기에서 처치해 묻어버리고 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것 역시 동감이다.” “이 새끼가 진짜…!”
두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 서로를 노려보는 와중 시꺼멓고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부순 것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스켈레톤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레바엔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진짜…… 성가시네!!”
츠키에테는 침착하게 전투태세를 취하며 말했다.
“그럼 돌아가든지. 츠뮤에게는 네놈이 먼저 도망쳤다고 전해주지.”
레바엔은 이를 으득 갈며 말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네놈이나 먼저 도망쳐라.” “사양한다.”
그리고 단숨에 대검을 고쳐 쥔 레바엔이, 츠키에테와 동시에 도약해 스켈레톤에게 달려들었다.
“필요한 것이 있어요.”
시작은 어느 한가롭던 오후, 두 남자를 불러 모은 츠뮤가 꺼낸 첫마디였다.
“파이델른이라는, 지금은 멸망한 마국의 고성이 있어요. 그 지하에는 미로로 된 던전이 있는데, 그 던전의 끝에는 이블아이라는 보석이 있대요. 그 자체로도 강력한 유지 마법이 광대한 범위로 발동되는 마법석이라, 파이델른의 고성이 멸망한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힘에 의해 형태가 고스란히 보존된 거라고 하더군요.”
턱을 괸 채로 삐딱하게 앉아 심드렁히 이야기를 듣던 레바엔이 툭 내던지듯 물었다.
“그래서? 그게 필요해? 왜?” “그야, 우리 성에 두고 싶어서. 우리 성, 많이 낡았잖아. 얼마 전에는 걷는데 천장에서 돌조각 하나가 뚝 떨어지더라고. 아무래도 점점 무너져가고 있는 것 같아. 보수를 해야 할 거 같은데, 살펴보니 여기 자체가 워낙 부실공사 수준이라 아예 새로 짓는 게 나을 수준이더라. 근데 왕실에는 지금 그만한 돈이 없어. 알다시피 복지사업에 돈을 다 쏟아 붓고 있는 형편이라…….” “그래서, 그걸 성에 갖다 두시겠다?” “응. 좋을 거 같지 않아? 보수공사는 지금 해도 나중에 또 해야 되는 거지만, 이건 영구적이잖아. 천재지변에도 대비할 수 있다고.” “그래서, 좀 가져다 달라?” “응.” “귀찮은데.” “…….”
심드렁한 대꾸에 실망한 듯 눈을 깜빡이던 츠뮤가, 애절한 표정을 짓고선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내 부탁…… 좀 들어주면 안 될까?” “…….”
레바엔은 지금 만년 둔탱이 같던 어느 여자의 진화 과정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여자란 나이를 먹을수록 여우가 돼 간다더니, 설마 이 여자마저 이럴 줄이야……. 잠시 그를 마주한 채 생각에 잠겨있던 레바엔은, 이윽고 씩 미소했다.
“부탁에는 뭐든 대가가 있어야지. 네 부탁 들어주면 뭘 해줄 건데?” “엣. 뭐가 좋아?” “바라는 거야 많지. 가령…….”
레바엔은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츠뮤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 순간, 레바엔과 츠뮤 사이에 손이 하나 놓였다.
“됐다.”
그때까지 딱딱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츠키에테였다.
“내가 하지.”
두 사람의 고개가 나란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뭐 씹은 듯한 표정이 된 레바엔이 그쪽을 향해 이죽거렸다.
“호오. 명부의 왕께선 그리도 한가하신가? 그런 일을 직접 다 하시게?” “소중한 여동생의 부탁인데 무리해서라도 들어줄 가치가 있지 않나.” “하이고. 그냥 내가 수작 거는 게 싫다고 말하시지 그래?” “안다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군.” “이 새끼가 진짜…!” “그만.”
레바엔이 금세라도 츠키에테에게 덤벼들 듯 으르렁대자, 츠뮤는 사뭇 엄격한 표정과 어조로 말을 잘랐다.
“그렇게 싸울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둘이 같이 가야하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츠뮤를 돌아보았다.
“뭐?!” “어째서?!” “이블아이의 던전은 마족의 피를 지닌 자가 두 명 이상 갈 때만 열린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강력한 몬스터가 득실거려서 혼자서는 무리예요. 생각해봐요. 여태껏 탐내는 이가 저뿐 만은 아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 되는 마법석이 왜 계속 거기에 있겠어요? 수백 년간 누구도 쉬 넘보지 못했을 정도의 어려운 입장 조건과 극악한 난이도 탓이지.”
레바엔은 어이가 싹 나간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래서, 지금 날더러 이놈이랑 같이 가라고?!”
츠키에테는 애써 평정을 지키며 반박했다.
“굳이 저 녀석이 아니어도, 같이 갈 마족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츠뮤는 고개를 저었다.
“고대 고위 마족이 아니면 안 돼.” “…….”
결국 츠키에테도 평정을 지키는 데에 실패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정색하며 말했다.
“츠뮤.” “네, 오라버니.” “차라리 보수공사를 하지 그래. 아니, 아예 성을 새로 지어도 좋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보태주지. 얼마가 필요하든 말만 하면…….” “그건 싫어.”
츠뮤는 츠키에테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단호히 거절했다. 츠키에테의 표정에 한층 더 난감함이 번졌다. 사실 츠뮤가 금전적으로 도와주겠노라는 츠키에테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츠뮤의 성격을 잘 아는 츠키에테로서는 그를 납득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츠뮤가 부족한 예산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느라 고군분투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더 권유도 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츠키에테는 따지듯 말했다.
“네 자존심이란, 내게 돈을 받으면 상하고 보석을 받으면 상하지 않는 거냐.”
츠뮤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슨 논리야, 그게.” “일반적인 논리야. 여자는 선물로 보석을 받으면 기뻐하지만 돈을 받으면 불쾌해하지.” “하지만 내겐 돈보다 보석이 더 민폐다.”
그 말에 츠키에테 못지않게 정색한 츠뮤가 츠키에테를 노려보았다.
“날 위해 보석을 가져다주는 일이 오라버니한테는 그저 민폐야?!”
츠키에테는 당황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날 위해서는 뭘 줘도, 어떤 일을 해줘도 아깝지 않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오라버니도 결국 흔해빠진 남자였구나!!” “……우와, 공주님이 흔해빠진 여자 같은 소리를 다 하네.”
레바엔이 옆에서 혀를 차자 츠뮤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도 싫어?” “아니, 난 좋…….”
얼떨결에 좋다고 대답하려던 레바엔은, 그 순간 츠키에테와 눈을 마주치곤 퍼뜩 정색하며 소리쳤다.
“좋지만!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만…! 저 자식이랑 같이 가는 건 싫다고!!” “동감이다.”
츠키에테는 레바엔이 뜻대로 반응한 것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서로를 싫어해?? 형제잖아!! 사이좋게 좀 지내라고 그간 누누이 이야기했는데!”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무리다.” “죽어도 무리야.” “그래서, 날 위해 함께 던전을 도는 정도의 일도 못해주시겠다?”
츠뮤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한톤 내려갔다.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그 목소리만큼이나 묵직하고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다들 굳어있는 와중, 츠뮤는 조용히 일어섰다.
“됐어. 난 강요는 안 해.”
두 남자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을 자른 츠뮤는, 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결과에 실망할 뿐이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한 츠뮤는, 돌아섰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 “…….”
그리고 긴 침묵 끝에, 츠키에테와 레바엔은 떫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너무나도 떫은 표정이고 떫은 심정이었지만, 두 남자는 결국 서로에게 암묵적인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녀에게 흔해빠진 남자만은 될 수 없었으므로.
파이델른의 성은 과연 불길했다. 거무스레한 담쟁이덩굴로 온통 뒤덮인 검은 성은 음침하기 그지없었고, 주변을 맴도는 검은 안개가 그 불길함에 힘을 더 보태주었다. 그 속을, 츠키에테와 레바엔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섯 보 정도의 간격을 유지한 채 터덕터덕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던전의 입구는 더욱 불길했다. 성벽과 마찬가지로 거무스레한 덩굴에 뒤덮인 데다가 새까만 먼지가 전체를 뒤덮고 있어 덩굴과 문이 구분도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를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레바엔이 중얼거렸다.
“여기가 던전의 입구인가…….”
그리고, 손바닥으로 문을 밀었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더 줘 봐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레바엔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문을 마구 밀어댔다.
“안 열리는데?!”
그를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츠키에테가 말했다.
“고대 고위 마족 둘이 함께 와야 열린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왔잖아!” “이렇게 떨어져있는데 던전의 입구가 어떻게 두 사람이 온 거라고 알아먹겠나?”
레바엔은 이를 빠득 갈며 츠키에테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여전히 다섯 보 정도의 간격을 유지한 채였고, 츠키에테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레바엔이 하는 짓을 방관하고 있었다.
“알면 좀 가까이 와!!” “싫은데.” “나도 싫다고! 어쨌거나 들어가긴 해야 할 거 아냐!!”
츠키에테는 정말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닿지 마라.” “내가 할 소리다.”
둘의 거리가 한 뼘으로 좁혀졌다. 둘 다 뻣뻣하게 몸을 굳힌 채 결코 그 이상으로는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스치듯 옷깃이 닿자 츠키에테는 미간을 찌푸리며 닿았던 옷깃을 털어내었다.
“불쾌하군.” “동감이다.”
레바엔은 으르렁대며 다시 문을 밀었다. 이번에는 열렸다.
“열렸다.” “나도 보고 있으니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다.” “그냥 말한 거거든?” “꼭 필요한 말만 해라. 필요 없는 대화는 가능한 한 하고 싶지 않군.” “혼잣말이었다고!” “날 보며 말했잖나.” “아니거든? 그냥 본 거거든?” “아무튼 봤잖나.” “옆에 있기에 본 게 잘못이냐!” “잘못이지. 될 수 있으면 보지도 마라. 불쾌하다.” “너 임마, 자꾸만 이렇게 삐딱하게 나올래?!” “삐딱하게 구는 게 잘못이나. 그게 잘못이면 네 놈은 이미 천벌을 받았을 텐데.” “이 새끼가 진짜…!”
열린 입구는 안중에도 없이 으르렁대는 레바엔과 츠키에테를 향해 어느 순간,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문득 느껴진 살기에 두 사람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뭔가 시꺼먼 것들이 입구…… 즉, 그들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레바엔이 경악했다.
“스켈레톤?!” “……이 던전을 지키는 자들인가 보군.” “처음부터 저만한 숫자가 말이 돼?! 저건 거의 군대 수준 아냐?!” “군대겠지. 원래는 성이었던 곳이니, 군대 하나를 고스란히 스켈레톤으로 만들어서 이 성을 지키게 둔 것일지도.” “그럼 저것들이 모두 흑마법에 의해 변이된 인간이라고?!” “그렇겠지.”
냉담하게 말한 츠키에테가 레바엔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왜. 무섭나? 싸우기 꺼림칙하기라도 한 건가? 그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던지.” “……하! 저만한 숫자와 혼자 싸워도 괜찮으시다?” “그렇지.” “웃기시네! 너야말로 무서운데 괜히 허세 부리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오히려 난 혼자 싸우는 쪽이 편하다.” “꽤 자신만만한데, 뭣하면 각자 쳐부순 스켈레톤의 숫자라도 헤아려볼까?” “그러시던지.” “좋아!”
등에서 대검을 뽑아 공격태세를 취한 레바엔이 스켈레톤을 향해 덤벼들려는데, 쾅!!! 그 순간 사방을 뒤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섬광이 일었다. 바람과 번개의 마법이었다. 곧 빛이 사그라지자 스켈레톤 군대는 물론 마법이 닿았던 바닥까지 까맣게 타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숯의 경계는 정확히…… 레바엔이 디딘 발, 바로 한 뼘 앞이었다.
“악!!!”
레바엔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등을 홱 돌려 그 마법을 시전한 이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나도 맞을 뻔했잖아!!” “그거 유감이군. 맞지 않아서.”
태연한 대꾸에 레바엔의 어이가 폭발했다.
“그러니까 지금 날 노렸다, 이거냐?!” “설마 그럴 리가. 네가 그렇게 무식하게 덤벼들 줄 몰랐던 것뿐이다.” “그런데 왜 그런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데?!” “기분 탓이다.”
아쉬운 기색이 한층 더 가득해진 얼굴의 츠키에테가 뻔뻔스레 대꾸했다. 그리고 앞을 보았다.
“그보다, 이런 쓸데없는 걸로 논쟁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덩달아 고개를 돌린 레바엔의 눈에 방금 그만한 수가 죽고도 또 그만한 수로 몰려드는 스켈레톤들이 보였다. 츠키에테가 다시 마법을 시전하려는 순간, 레바엔이 도약했다. 시꺼먼 섬광을 내뿜는 대검이 공중을 세차게 가르는가 싶더니 지면에 내리꽂힌다. 쾅!!!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사방이 진동하며 바닥에 균열이 일었다. 흙먼지가 가시자 상황이 보였다. 시꺼멓고 거대한 원위에 까맣게 타들어간 것처럼 부서진 스켈레톤들이 처참하게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 범위가 닿은 곳은…… 츠키에테의 발, 바로 한 뼘 앞이었다. 질린 얼굴이 된 츠키에테가 고개를 들었다.
“너 이 자식…!” “유감이군.”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레바엔이 이죽거렸다. 그 다음 순간, 츠키에테가 휘두른 검이 레바엔의 귓전을 스쳤다. 검 끝에 레바엔의 머리카락 몇 올이 베어져나갔다. 욱한 레바엔이 제 검을 꽉 쥐며 츠키에테를 노려보았다.
“정말로 해보자는 건가?!” “그럴 리가.”
츠키에테의 검이 레바엔의 뒤에 서있던 스켈레톤에 박혀 휘둘러졌다. 한 마리 남은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와준 거다.” “하…! 네 놈이 있던 위치라면 굳이 내 앞에서 날 스쳐 찌르지 않아도 됐을 텐데?” “기왕이면 이쪽이 낫잖나.”
서슬 퍼렇게 자신을 노려보는 레바엔을 향해, 츠키에테가 보란 듯이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럴까?”
말이 나오기기 무섭게 레바엔이 검을 휘둘렀다. 검은 그대로 츠키에테의 뺨을 스쳐지나가 뒤에 있던 스켈레톤에게 박혔다. 얇게 베인 츠키에테의 뺨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은혜는 바로 갚아야지.”
다음 순간, 츠키에테는 노려보거나 망설이지조차 않았다. 소매 자락에서 나온 단검이 공중을 가르고 날아가 저쪽에 있던 스켈레톤에게 박혔다. 물론 그 검은 레바엔을 스쳐지나갔다. 그냥 스쳐지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팔을 베고 지나갔다.
“악! 너 이 새끼, 이건 진짜 작정하고 그런 거지?!” “천만에. 도와줬을 뿐이다.” “젠장, 진짜 못 해먹겠네!!! 네놈에게 여기를 돌파할 생각이 있긴 한 거냐?!” “그 질문, 네놈에게 돌려주마.” “애초에 어째서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드물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군.” “그래, 솔직히 네놈과 같이 여기를 돌파하기보다는 그냥 여기에서 처치해 묻어버리고 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것 역시 동감이다.” “이 새끼가 진짜…!”
두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 서로를 노려보는 와중 시꺼멓고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부순 것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스켈레톤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레바엔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진짜…… 성가시네!!” “그럼 돌아가든지. 츠뮤에게는 네놈이 먼저 도망쳤다고 전해주지.” “어림도 없는 소리. 네놈이나 먼저 도망쳐라.” “사양한다.”
그리고 단숨에 대검을 고쳐 쥔 레바엔이, 츠키에테와 동시에 도약해 스켈레톤에게 달려들었다.
전투는 치열하게도 계속됐다. 싸우면 싸울수록 서로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다. 그 상처의 절반이 대부분 적이 아닌 아군이 낸 것이라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서로의 검이, 마법이, 능력이 적을 공격하는 척하며 서로를 공격한다. 그 피를 부르는 신경전은 쉬 끝나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이 이런 신경전을 벌이지 않고 힘을 합쳐 싸운다면 이것이 이렇게 오래 걸릴 전투조차 아니라는 것을, 이래서는 이 싸움이 빨리 끝나기는커녕 끝나지조차 않으리라는 사실을 둘 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저 상대가 빌어먹을 놈에 썩을 놈이었다. 그 사실을 서로가 머리에서 계속 생각하는 한, 이 싸움이 끝날 리는 없어보였다.
“……아무튼, 루네스 에민카렌이 가장 번영했던 시기에, 가장 번영했던 성국이 지은 성인걸. 대륙 최고의 건축과들과 어마어마한 인력이 동원되고 신녀와 신관들의 성력까지 축적되어 지어진 성이야. 몇 천 년이 지나도 끄떡없겠지.”
이델로즈는 치즈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말했고, 츠뮤는 포크를 치즈 케이크에 꽂으며 물었다.
“이런다고 그 둘의 사이가 좋아질까요, 이델로즈?” “되든 안 되든 노력은 해봐야지. 그 꾸준한 노력이 쌓여 언젠가는 결실을 이룬다는 게 우리 여왕님의 신조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만…… 음, 그 두 사람을 사이좋게 만드는 일은…… 뭐랄까. 나라를 재건하는 일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달까…….” “뭐, 던전 하나를 돌며 함께 싸웠다고 당장 사나이의 우정이 끓어오르진 않겠지.” “아무래도 한 번으로는 무리겠죠. 미리 또 그런 던전을 더 찾아둘까요?” “응, 그게 좋겠다. “다음에는 뭐라고 말하며 보내지…….”
츠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서를 뒤적였다. 당장은 두 사람이 도는 던전에 끝이 온다 한들, 진정한 끝이 오는 때는 요원할 것 같았다.
이번 주가 ~밀린 글 해치우기 주간~ 이라서 일단 그 첫타자로 쓴, 무려 작년(!)에 마창 내기로 써주기로 했던 밸슷밸입니다.
밸이 당시 리퀘했던 내용은 밸의 남자다운 모습에 두근거리는 슷이었지만 그런 거 없ㅋ다ㅋ 사실 저 내용으로는 영 삘이 안 오기에 그냥 밸슷밸로 쓰면 안 되겠냐고 부탁해서 허락 받았음.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도 정말 괜찮은가 ㅋㅋㅋ 일단은 밸이 낸 회지 내용이 기반입니다만... 그 주제에 너무 내 해석의 밸슷밸이라서 면목없고 길원들을 많이 출연시킨 건 좀 뿌듯함.
왠지 제비백숙 쓸 때랑 비슷한 감성으로 써버린 것도 같지만... 에이, 그거보다는 훨씬 라이트하지. 마비노기나 저희 길드 모르시는 분도 단편 러브 코미디 정도로 여기고 보시면 좋을 듯 ^.^...
여튼 소설란에 올리기 뭣한 잔소설은 앞으로 이쪽에 올라옵니다.
오후 1시 이전,
소년은 프러포즈에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오후 1시,
망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밸은 28번째로 그 생각을 하며, 달렸다. 던바튼 감자밭에서부터 두갈드 아일, 두갈드 아일에서 소용돌이
언덕까지, 아무튼 있는 힘껏 달렸다. 누군가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달렸다. 달리기를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달린다. 달리는 거다. 나는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흐어어어어어ㅓ어엉ㅓㅓ어엉어헝!!!”
밸은 절규했다. 우렁차지만 흡사 짐승의 소리 같은, 괴성에 가까운 그 절규는 그의 뜀박질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 언덕 가득 메아리처럼 울려댔다.
오후 1시,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슷이 중얼거렸다. 마침 옆에 있던 하이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슷?” “밸이 도망갔어.” “……밸이?”
하이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 차이가 나는 소꿉친구처럼 늘 붙어 다니는 슷과 밸이었지만, 사실 누나인 슷이 밸을 장난감이나
다름없이 가지고 놀며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관계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순둥이 같은 밸이 늘 참거나
당해주곤 했는데,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 밸이 도망을 다 갔지. 슷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치마
같은 옷을 입은 밸에게 아이스케키? 뱀 잡아와서 쫓아다니며 겁주기? 낚시대를 채찍마냥 휘두르며 여왕님 놀이? 예상 답안으로 평소
슷이 잘 치던 종류의 장난을 하나씩 떠올리며, 팔짱까지 낀 하이가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말해봐, 슷. 이번에는 또 무슨 장난을 한 거야?” “별로…….”
슷이 곤란한 듯 뺨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냥…… 프러포즈 했을 뿐인데.” “뭐?”
하이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온갖 예상 답안을 다 떠올린 하이였지만 이런 대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러포즈로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프러포즈로 사람을 괴롭혔다…… 이 말인가?
과연 슷. 상식을 뛰어넘는 오징어로구나. 무서운 아이…!
오후 2시,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밸은 소용돌이 언덕 정상에 웅크리고 앉아 41번째로 그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손에 호미가 쥐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웬 호미…… 아차, 나 성당 알바 중이었지.”
그래, 그저 성당 알바 중이었을 뿐이었는데…… 해가 중천에 뜬 대낮,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는 데에 여념이 없는 자신을 슷이 대뜸 부르더니 대뜸 말했다. 밸, 결혼하자!!!
“……으.”
그
순간을 떠올리자 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슷은 도대체 왜 그런 장난을…… 아무리 슷이라 해도 도가 지나치다. 원래도 진지한
구석이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슷이긴 하지만…… 아니, 충분히 칠 수 있는 장난이긴 하지. 슷은 자신을 어린아이로밖에 안
보니까. 자신의 마음 따윈 추호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런 건 그냥 장난이잖아? 분명히 장난일 거야. 평소랑 다를 바 없는
그냥 그런 장난. 그런 거에 놀라서 도망까지 치다니…….
밸은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가서 만나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겠지. 고작 이런 일에 겁을 먹고 도망쳐서는 어쩐단 말인가. 돌아가자, 밸. 너는 남자다. 그러니까…!
“……이따가 가자.”
밸은 다시 웅크려 앉았다. 무서운 걸 어쩌겠는가. 아무리 남자라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예요. 특히 슷 무서워, 슷. 나 슷이 무서워요…….
“……으흑…….”
밸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는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그러다 정확히 5분 후 또 결연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자!!”
그래봤자 1분도 안 돼서 도로 앉을 것이다. 벌써 29번째 반복 중인 동작이었다.
오후 2시.
여자들끼리의 비밀스러운 회의가 열렸다. 멤버는 슷과 하이, 마침 근처에 있던 지유와 리프였다. 타닥 하는 모닥불의 빛이 캠프 안을 일렁이듯 은은하게 밝히는 가운데, 생각에 잠겨 있던 하이가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장난이 아니라고?” “당연하지!!!”
슷이 13번째로 발끈했다.
“누가 프러포즈를 장난으로 하겠어?!” “……하지만 슷, 밸 좋아했어? 늘 괴롭히기만 했으면서…….” “괴롭힌 거 아냐!! 같이 논 거라고!” “……누가 봐도 괴롭히는 걸로 보였는데…….” “그야, 밸을 가만 놔두면 어쩐지 건드리고 싶어지잖아?” “……그간의 그게 다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초딩의 심보였단 말인가…….” “그럼 슷은 밸을 정말로 좋아하는 거야?” “당연하지!!” “진심이야?” “물론!”
반복되는 질문에 슷이 기어이 짜증을 냈다.
“다들 왜 그래? 당연히 좋아하니까 프러포즈하는 거잖아?! 안 그러면 왜 프러포즈 같은 걸 하겠어??” “……아, 그렇지만 슷은 왠지 그런 상식과 동떨어져 보여서…….” “게다가 밸은 슷에 비해서 너무 어리고…….” “클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지금도 그렇게 귀엽고 멋진데!! 크는 동안 누가 채가기라도 하면…!” “……아니, 점눈이 멋져 봤자지.”
지유가 옆에서 핀잔했다.
“과연, 그런 생각에 급 조급해져서 급 청혼을…….”
하이가 옆에서 분석했다.
“하지만 슷, 일반적으로 해가 중천에 떠있는 한낮에 감자밭 한가운데에서 호미질을 하는 상대에게 청혼하지는 않아. 그런 식이면 보통은 장난이라 받아들인다고.”
리프가 옆에서 조언했다.
“밸은 그때 뭐하고 있었대?” “감자 캐고 있었대.” “호미질 하다가 청혼 받은 남자인가…… 희귀한 경험했네.” “근데 도망은 왜 친 걸까?” “놀란 거 아냐?” “아니, 분명히 장난이라고 생각했을 걸.” “왜 내 청혼을 장난이라 생각해?” “아까 리프도 말했지만, 방법부터가 완전 틀렸다니까.” “이런 건 역시 무드가 중요해.” “이벤트지!” “그럼, 이벤트처럼 꾸며서 무드를 잡고 다시 한 번 도전해보면 어때? 우리도 도와줄게!” “오, 그거 좋다! 재밌겠다!!” “나도 찬성! 하자하자!!”
그렇게 네 여자가 머리를 맞댄 캠프 안에서, 밸을 더욱 무섭게 할 일이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오후 3시,
근심 어린 표정의 밸이 비틀거리며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는 그의 혼란스럽고 지친 정신 상태를 표현함과
동시에, 고민하며 앉았다가 일어났다를 하도 많이 해 힘든 육체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 상태로 힘없이 길을 걷던
밸은,
“저거 잡아!!!”
갑자기 나타난 지유와 리프에 의해 붙잡혔다. 워낙 작은 밸인지라 두 여자의 힘만으로도 금세 제압당하고 번뜩 들렸다. 지유와 리프는 밸을 들쳐 메고는 달려, 성당 앞에 도착해 문을 벌컥 열어 재끼고는 밸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악!!”
충격에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밸이 겨우 그를 추스르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밸의 눈앞에는 불을 밝힌 초가
쭉 놓인 환한 길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슷이 있었다. 환하고도 수줍게 미소 짓는 슷. 그런 슷이, 조금씩 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스, 슷…….” “……밸…… 아침에는 미안했어. 내가 너무 무드가 없었지?” “……슷……. 아냐, 난…….” “밸, 이제 진지하게 말할게. 있지…….”
밸 앞에 선 슷이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대뜸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내 아를 낳아도!!!”
밸은 기겁했다.
“헉…!!”
놀란 밸이 뒷걸음질을 치다 옆에 놓인 선물 상자를 발로 걷어찼다. 상자가 휭 공중으로 날아가며 속에 든 것이 쏟아져 내려왔다. 마치 우박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마치 하나하나가 춤추듯 나풀거리며 내려오는 그것은,
오징어 다리였다.
“헉, 내 예물이!!!”
오징어 다리를 맞으며 슷이 절규했다.
“예물?! 오징어 다리가?!” “이게 예물이라고?!” “이런 건 도대체 언제 준비한 거야?!”
밸이 황망히 오징어의 비를 맞고, 지켜보던 하이와 지유와 리프가 경악하며 한 마디씩 하는 와중,
“밸한테 선물로 주려고 그간 오징어 먹을 때마다 몸통만 먹고 아껴둔 건데!!!”
슷은 계속 절규했다. 그리고,
“……큭, 이건…!” “오, 오징어 타는 냄새다!!”
오징어 다리가 촛불 위에 떨어졌는지 오징어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성당 안에서 웬 소란이…….”
타이밍 좋게 성당 안에 들어선 크리스텔 사제가, 그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아, 아니…… 여러분, 이게 다 뭐죠?!”
프러포즈. 슷의 첫 번째 프러포즈는 감자밭 한가운데에서. 슷의 두 번째 프러포즈는…… 오징어 냄새. 오징어, 오징어라니…!!
“……이건, 이건 아냐!!!”
뒷걸음질을 치던 밸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밸!!!”
슷은 도망치는 밸의 뒷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하게 서있었다. 아니, 서있는가 싶었다.
“……밸,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어!!!”
슷은 욱해서는 밸을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쪼…… 쫓아!!”
하이와 지유와 리프가 그 뒤를 쫓았다.
“성당 안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도망치다니!!!”
덤으로 크리스텔 사제가 그 뒤를 쫓았다.
오후 4시,
던바튼 마을에서는 기가 막힌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망치는 밸까지는 괜찮았다. 작은 몸집의 밸은 여기저기 숨어 다니며
다람쥐처럼 잽싸게, 귀신처럼 빠르게 도망 다니고 있었다. 문제는 슷이었다. 목표물을 향해 전진하는 야생마처럼, 사냥감을 향해
달려드는 맹수처럼 밸을 쫓는 슷의 질주본능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너무 거리낌이 없어 질주에 방해되는 것은 모조리 밟거나 걷어차거나
꿰뚫고 다녔다. 덕분에 슷이 지나간 곳마다 사고가 끊이기 않았고 사고의 피해자 역시 끊이지 않았다.
피해자 1, 식료품점 글리니스 씨.
“우리집 식료품들을 다 걷어차 버리고 도망치다니!!!”
피해자 2, 잡화점 발터 씨.
“우리 아이라에게 줄 치즈 케이크를 밟고 도망치다니!!!”
피해자 3, 의류점 시몬 씨.
“나의 엘레강스한 물레와 베틀을 부수고 도망치다니!!!”
피해자 4, 모험가 조합 에반 씨.
“밤을 새워 결제를 마친 서류들을 날려버리고 도망치다니!!!”
피해자 5, 힐러집 마누스 씨.
“내 소중한 약물 콜렉션을 깨버리고 도망치다니!!!”
……등등 그들의 추격전이 계속 되면 될수록 피해자가 속출했고 그 추격전에 가담하는 사람도 늘어만 갔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그 선두에서 도망치며, 밸은 이제 몇 번째인지조차도 모를 절규를 하고 또 했다.
오후 5시,
“길드로 민원이 또 들어왔어!!!”
길드홀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비퍼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도대체 이 바보들이 뭐하는 짓이지?!”
서류를 받아든 운류 역시 골치가 아픈 건 마찬가지인 듯 미간을 찌푸렸다.
“프러포즈라는군.” “프러포즈?!”
비퍼가 어이가 없다는 듯 창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추격전이 프러포즈라고?! 저런 프러포즈가 세상에 어디 있어?!”
운류가 설명했다.
“슷이랑 밸이잖아.”
비퍼가 납득했다.
“아, 슷이랑 밸이구나…….”
조금 표정이 풀어진 비퍼가 창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슷이나 밸이나, 서로에게 마음에 있는 것이 확실한데 어째서 저런 짓을 하는지.” “아직 어리고, 서투니까.”
운류가 잔잔히 미소했다. 그를 마주 본 비퍼는 회상했다. 그들에게도 어리고 서툰 시절이 있었지. 이윽고 덩달아 잔잔한 미소를 띤 비퍼가, 쓰게 웃었다.
“그래, 아직 애기들이지. 하지만 그걸로 저렇게 주변에 폐를 끼쳐버리면, 귀여우니까~ 하고 넘어갈 수준이 아닌 걸?” “물론 길드로 민원이 들어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지. 이제부터 길드에서도 추격전에 가담한다. 더 이상 추격자가 늘기 전에 반드시 생포해서 사건을 정리하지 않으면…!”
결연히 말한 운류가 일어서는데,
“쉽지 않을 걸.”
그때까지도 주변의 소동에는 아랑곳도 없이 소파에 누워 낮잠 삼매경에 빠져있던 까만 소년이 심드렁히 말했다. 그쪽을 바라본 운류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냐, 레바엔.” “목표물이 밸이란 말이야. 오랜 시간 슷과 함께 다닌 덕분에 도망에는 도가 튼 녀석이거든. 아무리 많은 사람이 쫓는다한들 저 녀석이 진심으로 도망치고자 마음을 먹은 이상 쉬 잡을 수 없을 걸.” “그래서, 무작정 쫓는 거 외에 딱히 좋은 수라도?” “…….”
잠시 멍하게 있던 레바엔은 몸을 쭉 늘려 기지개를 펴고는 돌아누웠다.
“뭐, 별로. 수고해.” “……그러지.”
잠시 그를 응시하다 돌아선 운류가 비퍼와 함께 길드홀을 빠져나갔다.
오후 6시,
밸은 여전히 도망치고 있었다. 이젠 뭐 때문에 도망치기 시작했던 건지 밸조차도 가물가물할 수준이었다. 그저 미친 듯이 쫓아오는
추격자들의 모습에서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잡히면 죽는다!! 절대로 죽는다!! 밸은 미친 듯이 도망쳤다.
“……과연. 저래서는 절대로 못 잡겠는걸.”
운류와 비퍼는 건물 옥상에서 요리조리 잽싸고 빠르고 도망치는 밸을 지켜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은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비퍼가 어떤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앞으로 5분 후, 밸의 도주 예측 지점은 저곳!! 운, 저기로 착지를 하며 동시에 발구르기를 시전해줘!!” “알았어!!”
달리던 운류가 그대로 힘을 실어 땅을 박차 도약했다. 쾅!!! 자이언트의 거대한 발에 힘과 체중이 실려 지면을 차자 그 주변에는 지진 같은 진동이 일었다. 그 요동에 도망치던 밸이 비틀거렸다.
“지금이다, 비퍼!!” “알고 있어!! 받아라, 밸!!”
날아와 착지해 밸의 앞을 막은 비퍼가 실린더를 앞으로 내밀어 라이프 드레인을 시전했다.
“……윽!”
라이프 드레인에 잡힌 밸의 발이 꽁꽁 묶인 듯 느릿해졌다. 더는 달리지도 못하고 스킬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밸이 괴로운 신음을
뱉었다. 물러서 라이프 드레인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봤자 뒤로는 추격자들이 달려오고 있다. 영락없는 독안에 든 쥐였다.
“이제 끝이다, 밸!!” “……크윽!”
뒷걸음을 치다 이를 빠득 간 밸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그 순간,
쾅!!! 사방을 뒤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뒤섞인 연기가 일었다.
“이, 이건 긴급 탈출 폭탄 B…!!” “캐쉬템을 쓰다니, 비겁하다 밸!!”
추격자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연기가 사그라졌으나, 밸은 이미 그곳에서 사라진 후였다.
오후 7시,
밸은 마을 바깥으로 벗어나 있었다. 땀으로 푹 젖어서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앞뒤로 움직여 비틀거리며
뛰고 있었다. 이제는 밸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만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뛰고 있었다. 여기서 잡히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도대체,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슷…….’
슷을 떠올리자 불현듯 설움이 복받쳤다.
슷이 자신을 어린아이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과 슷이 함께 걸어가면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쑥덕대거나
키득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자치곤 큰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보이쉬한 얼굴의 슷과, 또래치고도 작은 키에 어딘가의
도련님처럼 하얗고 뽀얀 피부, 여자애처럼 곱상한 얼굴의 밸.
그래서 밸은, 슷과 나란히 서도 우습지 않을
정도로 크고 듬직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우유를 토할 정도로 마셔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까매지고 싶어서 썬텐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서 이 낯선 곳에서 자리를 잡고, 돈도 많이 벌고, 커다란 집도 사고, 그렇게 슷 정도는 거뜬히
책임져줄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한 남자가 돼서. 그렇게 돼서…….
프러포즈는, 언젠가 자신이 하고 싶었다.
붉은 황혼이 지는 근사한 곳에서, 단둘뿐인 이벤트를 마련해 무드를 잡고,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근사한 반지를 사서,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근사한 모습으로, 로맨스 소설에 나올 듯한 근사한 말로 고백하고 청혼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으흑…….”
밸이 흐느꼈다. 달리며 눈물을 흩뿌렸다.
“도와줄까?”
그때 낯익은 금속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엉겁결에 돌아보니 수레에 비스듬히 기대선 까맣고 작은 소년이 있었다.
“……레, 레바…….” “도와줄게.”
도와주겠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안도감이 솟구친 밸의 걸음이 멎었다. 그 순간,
레바엔은 냅다 밸을 걷어찼다.
“윽!!”
저항할 새도 없이 넘어가 바닥에 나뒹군 밸이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아. 그야 널 도와주는 짓이지.”
뻔뻔하게 대꾸한 레바엔이 밸의 몸을 발로 꾹 눌러 밟았다.
“윽!! 이, 이게 무슨…!” “앗, 저기에 있다!!”
던바튼 북문으로 막 나온 추격자 중 하나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곧 뭔가가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두려움에 질린 밸이 바동거리며 애원했다.
“놔, 놔줘! 어서 도망가야…….” “싫은데.”
레바엔은 그 애원을 간단히 거절하며 발에 더욱 힘을 줘 밸을 밟아 붙들었다. 그리곤 씩 웃었다.
“남자라면, 설령 아무리 해괴해도 여자의 프러포즈에 도망쳐서는 안 되는 거다, 쨔사.” “……뭐?”
불현듯 멍해진 밸이 눈을 깜빡였다. 믿음직한 남자가 되고 싶었는데, 여기서 도망치면 남자조차도 아니라고?
“……프러포즈라고?”
가장 처음으로 도착한 글리니스가 밸을 잡으려다 그 단어에 한 발자국 물러섰다. 뒤이어 도착한 시몬이 의아한 듯 글리니스를 보며 물었다.
“왜 그래, 글리니스 아줌마?” “프러포즈라는데요?” “프러포즈? 이게 그런 엘레강스한 이유 때문이었어?”
그 뒤에 도착한 사람도 멈춰섰다.
“프러포즈?” “프러포즈래요.” “프러포즈 때문이었어?” “프러포즈라니…….”
곧이어 도착한 사람들도 프러포즈라는 단어에 밸을 잡는 대신 그 주변을 빙 둘러쌌다. 프러포즈라는 단어는 마치 파장처럼 사람들 사이로 크게 번져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원으로 둘러싼 채 지켜보는 가운데, 슷이 도착했다.
추격전을 시작한지 4시간 만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슷.” “……밸…!”
이미 도망칠 마음도 기력도 없는 밸이었지만, 실로 유감스럽게도 슷은, 아직도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상황 파악도 하지 못했다. 슷은 밸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팔을 낚아챘다.
“어?”
그와 동시에 밸의 몸이 공중을 휭 나르는가 싶더니, 쿵 소리와 함께 지면에 내려앉았다. 눈앞에 별이 번뜩였다. 하늘이 보였다. 먹먹한
통증 속에서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밸이, 곧 상황 판단을 했다. 슷이 날 엎어치기했다!!! 그리고, 하늘 위로 슷의 얼굴이
보였다.
“……밸…… 허, 헉…… 잡았다…….”
숨을 헐떡이며 그렇게 말한 슷이, 대뜸 외쳤다.
“잡았으니까…! 나랑 결혼해줘!!!”
……뭐?
“오오오!!!” “청혼했구먼!” “용기있는 처자일세!!” “그래,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지!” “미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을 때야!!”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는구먼!” “청춘이군!!!” “받아주게, 총각!” “결혼해!! 결혼해!!”
사람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던지더니 급기야 박수를 치며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밸은 황망히 눈을 깜빡였다.
뭐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어메이징한 여자야.
밸은 그제야 깨달았다.
……슷, 이거 장난 아닌 거지, 진심인거지? 그럼에도 난…… 진심인 네 청혼에 난, 겁부터 먹고 도망이나 쳤는데, 그것도 2번이나 뿌리치고 죽어라
도망만 다녔는데, 네가 아무리 쫓아와도 몇 시간을 안간힘을 다해 도망쳤는데, 그런 나를 쫓고, 잡고, 하는 말이, 또 청혼이야? 넌
고민도 없어? 망설임도 없어? 자존심도 없어? 슷, 너는 도대체…….
“……하!”
거기까지 생각한 밸은 그만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 여자는 슷이지. 단순할 정도로 하나만 알고, 자신과는 달리 우물쭈물하지 않고, 쓸데없이 고민하지도 않는다. 목표가
정해지면 무식할 정도로 맹렬히 돌진한다. 그런 여자가 슷이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래서 반한 거였다.
밸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슷……,”
슷이 밸을 본다. 아니,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슷의 등 뒤가 온통 붉다. 밸은 그제야 황혼이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오부터 시작해 황혼이 내릴 때까지, 그야말로 온종일 도망 다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곳이 감자밭임도 깨달았다.
그렇게나 도망쳤는데도 겨우 이곳, 일이 시작된 처음으로 돌아와 버렸다는 것을.
두 사람의 세 번째 프러포즈는 최악으로 엉망이었다.
도망쳐 다닌 밸도, 쫓아다닌 슷도 엉망이었다. 두 사람 다 땀과 흙먼지로 뒤범벅이 돼 볼품없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렇게나 뛰어 다녔는데 두 사람의 몸에서는 아직도 오징어 탄 냄새가 나고 있었다. 게다가 감자밭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둘뿐이기는커녕 온 동네 사람들과 전 길원들이 다
몰려나와 있었다. 낭만이고 무드고 로망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밸은, 엎어치기 당했다. 엎어치기 당해서 감자를 깔아뭉갠 채
누워있었다. 등이 얼얼하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상태로, 밸은 입을 열었다. 간신히 대답했다.
“……좋아.”
아무튼 황혼이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오오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환호했다.
“받아줬구먼!!” “잘 됐네!!” “축하하네!!!” “경사로세!!” “한 잔 하세!!”
다들 환호하며 박수를 쳐댔다. 자신이 왜 그들을 쫓아왔는지는 다들 잊은 지 오래였다.
10년 후,
……
라는 이야기를, 딸에게 밸은 들려줬다. 지금의 밸은 슷 정도로 큰 키의, 여전히 말랐어도 넓은 어깨의 꽤 듬직한, 에린에서 자리
잡아 멋진 집을 가진, 슷을 포함한 여섯 식구를 거뜬히 부양하는 믿음직한 아빠가 돼 있었다. 그런 아빠가 해주는 이야기를 또랑또랑한 눈으로 다
들은 밸의 딸은, 주저도 없이 단박에 감상을 말했다.
“……우와…… 아빠, 멋대가리 없어.”
밸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흐, 흐흑…… 아, 아빠도 알아…… 흐흐흑…….”
오늘도 또 울었다.
#.
뒷이야기. 밸은 슷의 프러포즈에 대답하고는 곧장 기절. 슷은 자신이 밸을 엎어치기 한 건 생각하지도 않고 레바엔이 밸을 발로 차고 밟았기 때문이라 여겨 레바엔을 한 대 쥐어 팸. 사실 서너 대 더 때리고 싶어했던 거 같지만 한 대 맞은 레바엔이 잽싸게 도망가서 더 팰 수 없었음. 이 커플은 결혼할 때 싱난 슷이 밸을 공주님 안기해서 입장함. 물룽 신혼방에 들어갈 때도 ^.^... 그리고 이 밸과 슷의 딸이 밑에 나온 알로. 밸과는 달리 당차고 똑 부러진 아가씨입니다.
키뮤린입니다. 본명이 김유린인 것은 아닙니다. 닉 그대로 키뮤린이라고 부르셔도 되고 키뮤, 뮤린, 뮤, 린 등으로 줄여 부르셔도 됩니다. 트랙백을 보내고 싶은 글이 있으시면 따로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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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봐줘서 고마워! > < 글들은 내킬 때 천천히 보세요 ㅎㅎ 왠지 압박해버린 거 같아서 미안하네.
그리고 우리 아가씨 따뜻하게 안아줘───(˚∀˚)───!!! 꺄하하하하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