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il Sonata, 프롤로그를 너무 재미없게 쓴 것 같아서 다시 써봄.
재미없는 건 둘째치고 고민도 그다지 안 한 채 무작정 뻔한 루트를 따라 쓴 것 같아서 좀 자체 반성.
슈베르트의 마왕이 이런 대목에서 나오는 건 너무 뻔해서 안 쓰고 싶었는데 오히려 왕도인 게 분위기에 몰입하기는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냥 그걸로. 원래는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체를 넣으려고 했었습니다.
재미있긴 한데 어딘지 불쾌하고 불편하다는 감상을 듣고 새삼 깨달았는데 제 취향의 (혹은 즐겨 쓰는) 불편한 정서란 게 있는 거 같아요. 얼마 전 EBS에서 방영한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어딘지 굉장히 불편했는데 그 불편함이 흥미 돋고 재미있어서 넋을 놓고 봤지 :Q... 물론 그게 도덕성 문제라는 건 아님.
천재라 일컬어지는 연주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이와 악마와 계약한 이,
객석이 아닌 무대의 검은 커튼 뒤편에서도 선율은 울렸다. 무대 위의 연주자가 현에 활을 그어 자아내는 흐르듯 아름다운 선율, 슈베르트의 마왕이었다. 무대가 드리운 암흑 속에서 소년은 그 선곡에 감탄했다. 어린 아들을 죽음의 마왕이 뒤쫓는다. 아들을 지키고 싶은 아비는 말을 타고 어둠과 빗속을 뚫고 달려 마왕에게서 도망친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서, 아들은 마왕의 손아귀에 숨이 끊어져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있다. 곧 당신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재적인 연주에 청중들은 넋을 잃고 홀려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속지 않았다. 이것을 연주하는 것은 천재가 아니다. 악마다.
“악마의 연주야.”
소년의 옆에 있던, 그보다 더 작은 소년이 읊조리듯 낮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악마를 찾아야지.”
소년은 커튼을 젖혀 객석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악마는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객석에는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겠지.”
악마는 자신의 연주에 관심이 없다. 청중 속에 숨어 그것을 감상하는 것은 수치스럽다 생각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 주변, 연주가 닿는 곳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겠지. 그렇지 않으면 연주도 할 수 없으니까.
“넌 저쪽에서부터 찾아봐. 난 이쪽을 맡을 테니까.”
무대에서 내려온 두 소년은 반대편으로 갈라졌다. 복도는 관계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을 훑으며 걷던 소년의 귀에 뭔가가 들렸다.
“……이분이 엘 그레이의 약혼녀세요.”
“아,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악마의 계약한 자가 약혼 따위를? 소년은 귀를 의심하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약혼녀라는 여자를 보았다. 정장을 말끔하게 입고 백금발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묶은 미인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빙고, 그 보랏빛 속에서 붉은 점을 발견한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여자의 손을 붙들었다.
“잡았다.”
난데없는 소년의 행동에 여자와 여자의 주변 사람들은 당황했다. 소년의 뒤에서 그보다 더 작은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그들은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그들은 그곳이되 그곳이 아닌 곳에 있었다. 그곳이되 그곳의 배경만 옮겨온 듯, ‘사람인’ 것만 빠져있는 곳이었다.
“……진을 펼쳤나.”
여자의 얼굴에서 당황한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악마 특유의 냉철한 표정이 드러났다.
이것은 이계의 진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이 공간의 세계는 복제된 또 다른 세계로, 아까와 같지만 결코 같지 않다. 악마와 계약자 외의 생명체는 일체 배제된 상태이며 여기가 아무리 부서지고 파괴돼도 원래의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생성된 이 세계만 소멸될 뿐이다. 악마의 무력이 인간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금지돼 있기에 악마간의 결투는 이 이계의 진 안에서 하는 것이 규율이었다. 즉, 이 진은 악마들끼리의 결투가 시작됐다는 도화선이나 다름없었다.
“상당히 무례하군. 진을 펼치기 전, 정식으로 이름을 말하고 결투 신청을 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
“쓸데없이 왜 그런 짓을.”
소년의 뒤에 선 작은 소년이 말했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옷을 두른, 기껏해야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작은 소년이었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와 알 수 없는 압박감은 악마라 느껴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눌러쓴 검은 모자 아래로 내비치는 붉은 눈동자는, 언뜻 마주친 것만으로도 사람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그가 고개를 까닥하자 머리카락 사이로 귀에 꽂힌 은색의 작은 링이 번뜩였다.
“네 이름은 이미 알고 있어, 루시안. 그쪽도 어차피 내 이름을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지, 키르텔리체 레바엔. 네 악명은 제법 자자하니까 말이야. 네 놈이 잡아먹은 악마가 지상에 내려온 것의 절반을 넘는다지?”
“그리고 계약의 악마인 이상 결투 신청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그러니 여태 우리의 추적에서도 그토록 기를 쓰며 도망 다닌 것이겠고.”
“나는 내 계약자를 가능한 위험부담 없이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웃기는군. 도대체 언제부터 ‘음악가의 계약’에 계약자를 지켜야한다는 규칙 같은 게 있었지?”
“네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
루시안은 안경을 벗었다. 그와 동시에 렌즈 너머의 눈동자에 박혀있던 붉은 점이 번져나가며 보라색이 붉은색으로 변이했다.
키르텔리체는 그것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 안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단숨에 거대한 형상의 검으로 변한다. 그의 덩치만한 대검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검이되 검으로 보이지 않는 검이었다. 전신이 새까만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려버릴 것 같은 악마의 검, 펜타사이드.
어느새 루시안의 손에도 펜타사이드가 들려있었다. 키르텔리체의 것과는 달리 가느다란 은빛의 검으로, 마치 레이피어 같은 형상이었다.
저렇게까지 힘을 키웠단 말인가. 키르텔리체의 펜타사이드를 본 루시안은 내심 깊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간 수십, 수백 명의 악마들이 저 녀석에게 먹혔다는 건 소문이 아니었다. 이미 이 지상에 내려온 계약의 악마 중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 자는 없으리라. 그래서 여태껏 피해왔건만.
이것이 인간간의 싸움이라면 무기의 크기가 승패를 결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악마간의 싸움은 달랐다. 악마간의 싸움이란 곧 펜타사이드간의 싸움. 펜타사이드란 악마 고유의 무기로, 악마가 가진 특질에 따라 형체가 정해지고 힘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키르텔리체의 펜타사이드와 루시안의 펜타사이드는 얼핏 봐도 그 차이가 확연했다. 즉 이 싸움의 승패는 훤히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었다.
악마의 긍지를 걸고라도. 자신의 계약자, 엘 그레이를 위해서라도.
“싸울 텐가?”
어차피 응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걸어놓고 저딴 소리를. 하지만 루시안은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것은 악마의 긍지에 어긋난다. 대신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러지.”
그리고 그 공간에 눈부신 섬광이 일었다.
끼잉.
매끄럽고 아름답던 선율이 갑자기 어그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준 높고 완벽하던 음색이 애들 학예회 수준의 서툴기 그지없는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확연히 차이 나게 변이한 불협화음에 청중들은 동요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장난해?”
연주자, 엘 그레이는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청중들의 질타와 야유의 소리를 들었다. 천재라 칭송받는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악마와 계약을 하기 전에는 자주 듣던 그 소리. 이제 두 번 다시는 듣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그의 손에서 힘이 풀어지며 어깨 위에서 바이올린이 스르륵 떨어졌다.
쿵.
바이올린이 바닥에 팽개쳐지며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바이올린을 무대 위에서 떨어트리다니, 바이올리니스트라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실수다. 청중들은 분노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삿대질을 하며 노성을 질렀다. 그 속에서 엘 그레이는 황망히 중얼거렸다.
“……왜 이래? 루시안…… 혹시, 잡힌 거야? 져버린 거야? 루시안? 루시안?!”
악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악마는 죽었다. 이곳에는 악마의 힘을 빌려 천재의 흉내를 내던 평범한 인간 하나만이 황망히 서있을 뿐이었다.
“아아아아아!!!”
엘 그레이는 절규했다. 이곳에 인간을 현혹하던 악마의 연주는 더는 울리지 않았다. 연주자의 연주 대신 절규가, 청중의 찬사 대신 야유만이 가득히 울렸다.
모든 것이 사라진 무대에서 엘 그레이는 멍하니 서있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시 빼앗기고는 혼이 빠져나간 듯이 거기에 있었다.
“너무 그렇게 절망하지 마. 악마와 계약한 이상 파멸이라는 결말은 벼랑을 굴러 떨어지는 돌처럼 예정된 수순 아닌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엘 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비웃음이 보였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듯 무대 뒤편에 선 소년이 짓는. 엘 그레이는 분노했다.
“너…! 네가 루시안을!!!”
“그래. 설마, 평생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
“용서하지 않겠어!!”
엘 그레이는 소년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소년은 간단하게 그것을 피하며 그를 비웃었다.
“용서라니? 당신은 마땅한 대가를 받은 것뿐이야. 당신의 것도 아닌 악마의 연주로 인간들을 속이고 현혹시켰잖아? 그렇게 허황으로 얻은 찬사와 명예를 잃고 다시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져 다시 시작하는 것이 무서워? 우습지, 그건 처음부터 당신 것이 아니었는데.”
“정당한 일을 한 것처럼 말하지 마!! 네가 나와 뭐가 달라?! 너도 악마와 계약했잖아!!”
“나를 네놈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
소년의 눈동자에 고요한 분노가 깃들었다.
“난 너희 계약자들이 정말 싫어. 하나 같이 긍지도 근성도 없는 벌레 같은 것들이지.”
“너…… 너도 악마와 계약을 했으면 이해할 거 아냐!! 재능을 타고 태어나지 못한 자의 절망을…!”
“아니, 난 이해 못해.”
소년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죽어도 너희를 이해하지 않을 거야. 아무리 너희가 계약하게 된 상황이 절망의 구렁텅이었다 한들, 적어도…….”
적어도, 너희의 손에 손가락은 붙어있었을 것이므로.
소년은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꽉 쥐었다. 인간이 아닌, 악마의 손가락을.
그리고 등을 돌렸다.
“돌아온 절망의 구렁텅이를 잘 극복해보라고, 엘 그레이.”
엘 그레이는 그런 소년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너만은 다른 척, 고고한 척하지 마!! 너도 다를 것이 하등 없어. 언젠가는 네놈에게도 나와 같은, 아니, 훨씬 더한 절망과 파멸이 찾아오게 될 거다!!! 훨씬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소년은 조소했다.
“기대하지.”
그리고 내리막길을 밟아 무대에서 내려갔다.
바이올리니스트 엘 그레이는 자살했다. 그 대화를 나눈 지 3일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