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뮤는 귀가 밝았다. 사람이 몸을 쓰지 않고 침대 위에서만 지내다 보면 몸 대신 청각이나 후각, 촉각 같은 기관이 예민하게 발달한다고 하는데, 츠뮤가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그래서 츠뮤는 늘 똑똑히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오는 오라버니의 걸음 소리를.
그것은 단순히 츠뮤의 방이 새나 바람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외진 곳이기에 더욱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을 들르는 건 오라버니 외에도 아셀을 포함한 여섯 기사들, 주치의 이세느, 시종장, 하녀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건만, 츠뮤는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그 걸음은 두 번의 계단을 올라 세 번의 길을 꺾고 긴 복도를 지나 걸어오는 내내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울 정도로 신중하며 차분했고,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로 나직한 소리임에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감이 깃들어있었다.
그래서 츠뮤는 그 소리가 들려올 때면 어김없이 설레는 가슴을 안고 기다리곤 했다. 부드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 그 문 사이로 보이는 상냥한 미소,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온기, 온화한 어조로 대화를 주고받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하지만 지금, 츠뮤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듣고 있는 걸음 소리가 오라버니의 것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바라고는,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청년을 보고는 표정을 굳히고 마는 것이었다.
문을 여는 소리는 그 여느 때보다 부드러웠음에도, 그 어느 소리보다 더 무겁게 츠뮤의 마음을 에여왔다.

“기분은 좀 어때? 내 공주님.”

온화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츠뮤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츠메카린 츠키에테.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자 둘도 없이 소중한 오라버니.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왕국을 차지했던 자. 자신이 보름 전에 배신한 자. 7만 병력을 이끌고 내전을 일으켜, 그 병력을 쓰지도 않고 자신 혼자와 한 소녀의 힘만으로 전쟁을 이겨낸 자. 그렇게 왕국을 다시 차지한 자.
그는 자연스럽게 츠뮤의 곁으로 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치 예전처럼,

“오랜만이지? 네 이쪽 방은.”
“…….”

츠뮤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 방을 둘러보았다. 그를 배신한 이후 츠뮤는 방을 옮겼었다. 성의 주인이자 지도자인 여왕이 너무 외진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주변 측근들의 의견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괴로웠다. 그와 자신의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었으므로, 구석구석 어느 것 하나 그를 생각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는 곳이었으므로. 그래서 그를 배신한 이후에는 근처에 오지도 않았었다. 때문에 이쪽 방 역시 보름만이였다. 분명히 먼지가 쌓여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나서기 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를 지켜보는 츠뮤의 시선을 읽어내었는지 츠키에테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깨끗이 치워뒀으니까, 그간 고생한 내 공주님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며 상냥히 미소 짓는다. 내 공주님이라는 울림에는 예전 같은 온화함이 베여있었다. 그 역시도 이 방처럼 예전과 같았다. 그간의 일들은 모두 꿈이었다고 느껴버릴 정도로, 하지만,

“……나를,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요?”

배신하고 배신당했던 일들을 그렇게 잊을 수 있을 만큼 츠뮤는 우둔하지도, 약지도 못했다.
온화한 공기를 깨트린 채 다부지게 자신을 노려보는 츠뮤를, 츠키에테는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여유가 없구나. 우리 공주님은.”
“포로를 이렇게 두는 법 따위는 그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어요.”
“감옥에 가두기라도 할까? 네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차라리 그편이 마음은 편할 텐데요.”
“나도 그렇게라도 해야 분이 풀릴 것 같은데, 내 마음이 편치가 않아.”

츠키에테는 손을 뻗어 츠뮤의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자신을 말없이 응시하는 슬퍼 보이면서도 어딘가에는 차가움이 깃든 듯한 금빛 눈동자가, 츠뮤의 마음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고민 중이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가능하다면 그냥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지만,”
“……진심이에요?”
“넌 그렇지 않아?”

츠뮤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츠뮤의 힘없는 대답에, 츠키에테는 긴 한숨을 지으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등이 보이는 순간, 츠뮤는 숨을 삼켰다. 이불 속에 감추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망설일 겨를 따위는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 이 손에 왕국의 운명이, 자신의 측근이었던 여섯 기사들의 목숨이 걸려있다.
츠뮤가 빠르게 단검을 들어 그의 등을 찌르려던 찰나,

“……!!!”

그보다 더 빠른 동작으로, 츠키에테가 등을 돌려 츠뮤의 손목을 잡았다. 가까워진 금안과 금안 거리 사이에서 은빛 단도가 서슬 퍼렇게 빛난다. 그 빛에 반사되어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의 주인이, 입가를 올려 서늘한 조소를 지어 보인다.

“네가 이렇게 나올 줄도 알고 있었고 말이야.”
“……윽.”
“네가 나를 정말 적으로 생각했다면 내가 보이는 허점조차도 의심했어야지. 적이 이유도 없이 그런 것을 보여줄 리가 있겠어? 츠뮤, 똑똑하지만 순진한 내 공주님. 내가 너에게 속았던 이유는 널 믿었기 때문이야. 그러니 이제, 두 번 다시 내가 너에게 속을 일은 없어.”

강한 힘이 손목을 죄어온다. 그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츠뮤는 굽히지 않고 상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죽여요. 내가 당신에게 검을 겨누는 것을 세 번째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나를 죽여 버리세요. 당신이 내 어머니를 죽였을 때처럼,”
”……왜 그렇게 죽고 싶어 하는 거지? 네가 복수를 하고자 이러는 게 아니라 죽고 싶어서 이러는 것 같아 보인다면, 내 착각인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전 복수를…!”
“복수라, 네가 그런 것을 할 만큼 그 여자를 사랑했었나?”

츠뮤의 금안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그렇지 않다. 자신이 정말로 사랑했던 것은, 정말로 소중히 하고 싶었던 것은, 정말로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악하고 미친 여자였어. 너를 따스하게 안아준 적조차 없었지. 네가 그런 여자를 사랑했을 리 없어. 하지만 그래도 네 어머니였고, 내게 죽었지. 그러니 너는 살아있는 한 나를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복수를 하려 들 거야. 그게 네 의무니까. 네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네게 주어진 네 사명이니까. 그래. 네 말대로 일지도 모르지. 넌 정말로 그들이 없었어도 내게 복수를 하려고 했을 거야. 너는 원래부터가 그런 성격이니까. 그렇지?”
“…….”

츠뮤는 그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어깨를 떨며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울음처럼 보이는 떨림이었다. 그렇게 숙인 고개 아래로, 잦아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나를 죽여줘요…….”
“그건 안 돼지. 감옥이든 저 세상이든, 네가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어. 나는 너처럼 널 도망치게 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이고, 내 곁이야. 내 공주님.”

츠키에테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과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검은 복면을 쓴 사람이 한 남자를 끌고 들어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온몸이 상처와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츠뮤가 경악했다.

“……아셀!”
“대단한 남자야. 네게 복수를 종용한 건 자신 하나라고 끝까지 우기더군. 고문으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말이야.”
“당신이라는 사람은…!”

분노하며 츠키에테에게 고개를 돌린 츠뮤가 몸을 흠칫 떨었다.
잡힌 손목 너머로 츠뮤를 내려다보는 눈에, 여태 보지 못했던 무서운 것이 스며들어있었다. 츠키에테는 스산하게 웃으며 반대쪽 손으로 츠뮤의 원피스 끈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

“똑똑히 새겨둬. 네 몸 구석구석에, 네가 누구의 것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야…….”

단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엉켜온다. 뿌리치려는 힘과, 그것을 잡아두려는 힘이 맞물린다. 허나 맞물린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미약한 소녀의 힘은 저항이라고 하기에도 애처로웠다.
공포에 질려 부서질 듯 일렁이는 금빛 눈동자, 요동치는 손목, 필사적인 몸부림. 그것을 붙잡은 자는 웃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츠뮤를 내려다보며, 마치 떼를 쓰는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부드럽고 달콤하게, 하지만 위협하듯이 엄하게 속삭였다.

“반항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반항할 때마다, 저자의 손가락이 하나씩 잘려 나갈 테니까.”
“……아셀!”

츠키에테의 시선을 따라 옆을 바라보니, 검은 복면을 쓴 자가 아셀의 몸을 찍어 누르며 바닥에 펼쳐진 그의 손을 압박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향해 서슬 퍼렇게 선 은빛 단도의 날이 달빛을 받아 짐승의 눈처럼 번뜩인다. 그 와중에도 피는 계속해서 흘러내려 바닥에 흥건히 고여 갔다.

그 피가, 떠오르게 했다.
사이좋은 남매였던 두 사람. 온화했던 두 사람의 시간. 그 소중했던 것들을, 거짓된 것으로 바꾸었던 그 밤을.

「잘 들으세요. 공주님.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앞으로 그 무엇을 보게 된다 해도,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세요. 그렇게 하면 그자는, 적어도 당장은 당신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명심하세요, 공주님.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반드시 살아남으셔서, 여왕 폐하의, 어머니의 복수를…….」
「아카닉… 그자란?」

소녀의 질문에 여왕의 기사는 잠깐 망설이다, 낯익은 이름을 입에 담았다.

「츠메카린 츠키에테. 당신이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자입니다.」

그 울림에 소녀의 금안이 크게 흔들렸다.
믿고 싶지 않았다.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카닉이 3일 뒤 그에게 살해되지만 않았어도.

「기뻐요. 이제는 정말로, 오라버니께서 왕이 될 분이 되시는 거예요.」

그것은 진심이었다.
마치 새장 안에 갇힌 새 같이, 그를 속이기 위한 거짓된 대사를 읊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힘없고 약한 여동생을 연기해가며, 하루에 수천 번도 넘게 생각했다. 아아, 이것이 정말로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복수 따위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수도 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저랑 결혼해주세요, 오라버니.」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응. 약속할게.」
「네. 약속이에요.」

흩날리는 하얀 꽃잎 사이에서 두 작은 손가락이 만나 깍지를 끼워했던 덧없는 약속.
알고 있었다.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라는 것쯤은.

자신은 자라면서 남매란 결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게 될 거다. 그리고 그녀의 왕자님은 언젠가는 자신보다 더 소중한, 다른 공주님을 찾게 될 거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약속을 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꿈을 꾸었다.

깨어질 꿈이나마 잠시 품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것뿐이었는데, 그 밤을 경계로 오라버니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자가 되었고, 자신이 복수를 해야 할 자가 되었다. 그 밤을 경계로 모든 것은 가짜가 되었다. 언젠가는 붕괴될 버릴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것이 거짓이 되어도, 그에 대한 애정만큼은 거짓된 것으로 바뀌지가 않았다. 아무리 미워하려 노력해도 그가 좋았다. 사랑하고 있다. 지금도, 세상의 그 누구보다,

하지만 복수를 해야 했다.

그래서 츠뮤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의 손에 죽든지, 자신이 그를 죽이고 자신도 따라 죽든지.

“…….”

츠뮤는 눈물을 삼키며 츠키에테를 바라보았다.
늘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이, 지금은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차가운 조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행여 다칠세라 늘 조심해서 부드럽게 자신을 대하던 사람이, 지금은 자신의 몸을 억세고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제야 츠뮤는 실감했다. 부서진 거다. 이제는 정말로 다 부서진 거다.
뺨을 타고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맞물려 있던 손의 힘이 풀어지자, 그의 손이 유혹하는 듯 은근한 움직임으로 손목을 만지며 몸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잡아먹기라도 할 듯 몸과 몸을 강하게 겹쳐온다. 츠뮤는 원피스의 끈을 풀어 내리고 천과 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손을 그저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허한 눈동자, 표정 없는 얼굴. 그런 츠뮤를 내려다보던 츠키에테가 얼굴을 가까이해오며 눈물을 핥아내더니, 상냥하게 속삭였다.

“착하구나. 내 공주님,”

달콤한 속삭임과 타액이 귀를 적셔온다.
지금 자신의 몸에 감겨오는 체온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의 것.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것.

나를 낙원으로 인도하는 것도, 지옥으로 떨어트리는 것도 모두 당신…….





츠뮤가 정신을 차린 것은 창가로 햇살이 밀려오는 아침이었다.
힘없이 눈을 뜬 츠뮤가 작게 몸을 뒤척이자 온몸이 아릴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짧게 신음을 흘리며 옆을 보자 낯익은 청년이 보였다.

“……일어났어?”

츠뮤가 자는 내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지, 그는 턱을 괴고 누운 채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리깐 금안은 소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상냥한 빛을 띤 채, 한쪽 손으로는 츠뮤의 긴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매만지다 입술로 가져간다.

“다른 의미로 약하더구나. 네 몸은,”
“…….”

한순간 가져버렸던, 어젯밤의 일들이 꿈이라고 믿고 싶었던 츠뮤의 바람에 얼룩이 진다.

“뭐, 처음이었던 데다가 아직은 애니까. 한번 했으니 네 몸도 다음에는 좀 더 버텨주겠지.”

여전히 상냥한 모습을 한 채 쏟아내는, 지독히도 잔인한 말들. 설움이 복받친 츠뮤는 목이 메여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문을 열었다.

“……또… 하실 건가요, 그런 짓을?”
“물론.”

단번에 대답하며, 츠키에테는 낮게 웃었다.

“네가 누구의 것인지, 그 몸 구석구석이 철저히 깨달을 때까지. 네가 정신과 마음의 밑바닥까지 그것을 실감하게 될 때까지, 그래서…….”

츠키에테는 몸을 굽혀 츠뮤에게 얼굴을 가까이해오더니,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다시는,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않게 될 때까지.”

입술이 겹쳐지며 혀가 섞인다. 이제는 저항조차 없는 긴 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떨어지자 츠뮤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츠뮤는 그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울먹이며 말했다.

“……오라버니, 제발…….”
“네 의사 같은 건 이제 상관없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런……. 너무하세요.”
“너무한 건 배신 따위를 해서 나를 이렇게 만든 너야.
“……오라버니. 제발……. 우리, 친남매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그런 짓을……. 이상하잖아요. 이런 건 너무 이상해요. 그러니까, 제발…….”

그때까지도 계속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잠자코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던 츠키에테가 일순 손을 멈췄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아직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네?”

심상찮은 되물음에, 츠뮤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가슴에 섬뜩하고 불안한 것이 번진다.

“내 공주님. 우리가 남매인 게 이상해? 아니, 정말로 이상한 것은 그런 게 아니지. 기억해내 봐. 죽은 네 어미는 늘 말하곤 했지. 난 저 아이를 낳지 않았다. 뭔가가 잘못되어 저기에 저 아이가 있는 거다. 저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라 악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심지어, 여기 있는 자신의 어린 딸조차도. 이상하지. 이거야말로 이상하지 않아? 안 그래?”

츠뮤를 보지도 않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츠키에테는, 이윽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 츠뮤를 바라봤을 때도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만은 웃지 않고 있었다. 츠뮤가 그를 봐왔던 16년간 한 번도 본 적 없던 미소였다. 그 표정으로, 츠뮤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낮은 웃음소리 사이로 흘러나오는 메마른 목소리로.

“그녀는 정말로, 나 같은 건 낳지 않았는데 말이야…….”

츠뮤의 눈동자가 격렬히 일렁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들은 말의 뜻도, 저 표정의 의미도.
굳은 표정의 츠뮤를 보며, 츠키에테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웠다.

“어느 순간, 웬 아이가 생겨 있었지. 자신은 임신한 기억조차 없는데, 모두가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그녀는 아니라고 했지. 난 낳은 적이 없다고, 난 저런 아이 모른다고. 그렇게 아무리 사실대로 말해도, 아무도 그 사실을 믿어주지 않았어. 오히려 그녀를 손가락질하면서 말했지. 미쳤다고, 그렇게 그녀는 미친 여자가 되었고, 정말로 미쳐갔지. 오죽했겠어? 자신이 정말로 제 몸으로 낳은 딸마저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는데.”

그 말이 끝나고도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츠뮤가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래. 거짓말 같지. 그것도, 정말로 질이 나쁜.”
“그런 건… 그런 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죠?”
“나야 모르지. 난 그저 여기에 놓여 있었을 뿐이야.”
“……정말로… 모르나요? 아무것도?”
“그래. 몰라. 아무것도 몰랐지만, 죽기 싫다는 것만은 알았지. 그리고 잃기 싫다는 것만은 알았어. 이 성, 내 방, 내 위치, 네가 지어준 내 이름, 네가 불러주는 오라버니라는 호칭, 너와 함께 하는 시간, 네가 나에게 갖고 있는 마음, 그런 너와, 내가 가진 것들을 잃기 싫다는 것만은 알았어. 그래서 죽였을 뿐이야. 내게서 그것과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던 여자를,”

츠키에테는 다시 츠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천천히 다가와 츠뮤의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파르르 떠는 츠뮤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서야 츠뮤는 실감했다.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실감은 할 수 있었다.

싸늘하고 탁한 금안.
어떻게 여태까지 저것이 자신의 것과 같다고 믿으며 살 수 있었던가. 어떻게 여태까지 저런 존재를 남매라고 믿으며 마음을 줄 수 있었던가.
가슴에 차가운 것이 내려앉는다.
그랬다. 정말로, 어머니의 말 대로였다. 그는 그녀의 아들도, 자신과 피를 나눈 남매도, 왕가의 후계자도 아니었다.
그저 불현듯, 어느 날 이 성에 침범해 들어온, 누군가가 질 나쁜 장난처럼 놓아둔,

악마일 뿐이었다.
카테고리 :
Another
옵션 :
:
:
:
:

List of Articles
17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0
싸늘한 밤이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하늘 가운데에는 시린 색채로 선명히 그어진 달이 있었다. 모든 것을 잡아 삼킬 듯 강렬하면서도 모든 것을 어루만져주듯 은은한 달빛이 대지를 천천히 가로지르다 은밀하게 소녀의 몸을 훑고...  
16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1. 서막
체드의 고물상에서는 뭐든지 구할 수 있었다. 간판대로 자질구레한 고물 같은 물건들부터 시작해서 값나가는 골동품, 이국의 옷, 명검, 보물과 보석, 비약, 독약, 마약. 요긴한 것, 금지된 것, 아름다운 것, 비밀스러운 것, 위험...  
15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2. 전조 ①
“난 너 같은 것 낳지 않았어!! 낳지 않았단 말이다!!!” 여왕은 고막을 쨀 듯이 날카로운 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소년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바닥 저편에 날카롭게 깨져있는 유리 조각들이 보였다. 이마를 타고 뜨거운 액체가...  
14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2. 전조 ②
집무실로 들어서려던 츠키에테는 때마침 반대편 복도에서 걸어오던 레놉시스 밀렌 백작과 마주쳤다. 츠메카린의 귀족 중 보기 드물게 호인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는 이 중년의 남자는, 그 평판답게 츠키에테를 보자마자 사람 좋아 ...  
13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3. 균열 ①
3일후. 후계자의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거대하고도 화려한 여왕의 홀을 길고 곧게 가로질러 옥좌 아래까지 뻗어있는 푸른 융단을 밟고, 검은 예복을 두른 긴 흑발의 청년이 나아간다.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홀 양편에는 귀족들과...  
12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3. 균열 ②
“……감히!!” 분개하여 소녀에게 검을 들고 달려든 것은 평소에도 다혈질인 사이버트였다. 순간 츠키에테는 상황을 잊고 츠뮤를 구하기 위해 한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츠뮤는 우습다는 듯 몸을 돌려 그...  
11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4. 파장 ①
하텐미온의 왕자, 하텐미온 페이버티니아 온 카스텔이 츠메카린의 여왕 후계자, 츠메카린 츠뮤를 정식으로 만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여왕을 죽여 인형으로 부리며 갖은 폭정을 저지르던 간악한 혈육의 그늘 아래에서 7년간, ...  
10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4. 파장 ②
“체크메이트.” 또렷이 말하며 츠뮤는 나이트를 움직였고, 카스텔은 멍하게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사방이 막혀있는 탓에 킹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단 하나였다. 상대 퀸의 공격 반경. “……너 성격이 좀 나빠졌다?” “체크메...  
9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5, 붕괴 ①
아침에 약한 체질 탓에 눈을 떠 몸은 일으켰으나 침대에서 내려오지는 않은 채 멍하게 있던 츠뮤는, 밖에서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윽고 문밖에서 들려온 외침에는 정신이 새하얗게 일어나는 듯한 ...  
»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5, 붕괴 ②
츠뮤는 귀가 밝았다. 사람이 몸을 쓰지 않고 침대 위에서만 지내다 보면 몸 대신 청각이나 후각, 촉각 같은 기관이 예민하게 발달한다고 하는데, 츠뮤가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그래서 츠뮤는 늘 똑똑히 구분해 낼 수 있었다...  
7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5, 붕괴 ③
그가 나가고, 멍하게 있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되었다. 츠뮤는 잠도 자지 않은 채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방에 홀로 서있었다. 그러다 앞으로 걸어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높았다. 바닥이 까마득히 멀었다. 마법은 쓸 수 없었다....  
6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6, 혼돈 ①
소년은 홀로 서 있었다. 비쩍 마른 작은 몸에 뻗어져 나온 팔다리는 뼈만 남은 듯 바싹 마르고, 거뭇한 눈 밑 아래 뺨은 움푹 패여 몹시 초췌하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퀭한 붉은 눈이 드러난다. 마치, 짐승의 ...  
5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6, 혼돈 ②
레바엔의 걱정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이게 뭐야?!” 또한 기우였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레바엔은, 츠뮤의 발아래 쓰러진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자그마치, 장정 셋.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  
4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7, 굴레 ①
“본국으로 돌아가시죠.” “…….” 카스텔은 말없이 앞의 옥좌를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그 옥좌에 앉은 청년을. 노골적으로 적의가 담긴 시선이었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고 태연자약한 얼굴로 삐딱하게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  
3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7, 굴레 ②
다음날 아침은 화창했다. 루네스 에민카렌으로서는 드물게 구름 하나 없는 맑은 하늘을 관통해 내려오는 햇살이 따갑게 느껴졌다. 설렘도 짜증도 배가 되는, 그런 날씨였다. 레바엔은 건물 밖의 문 앞 계단에 심드렁히 기대 앉아...  
2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8, 속박 ①
성의 남서쪽에는 리엘 로이젠카의 탑, 혹은 츠메카린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탑이 하나 있었다. 성의 본관과 조금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그 탑은 성을 정문에서 봤을 땐 잘 보이지 않게 다른 건축물들에 가려져 있어 ...  
1 Another Another CHUMEKARIN,Ⅰ. 마녀의 땅 - #chapter 8, 속박 ②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성을 조금 벗어나있는 한적한 공터로, 비탈길 중간에 숲을 깎아낸 듯한 평지가 나무들을 둘러싼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검술을 수련하던 곳이지.” 그곳을 둘러보는 자신에게 츠키에테가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