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메이트.”

또렷이 말하며 츠뮤는 나이트를 움직였고, 카스텔은 멍하게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사방이 막혀있는 탓에 킹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단 하나였다. 상대 퀸의 공격 반경.

“……너 성격이 좀 나빠졌다?”
“체크메이트?”

카스텔의 불만에는 아랑곳도 않고 츠뮤는 시선은 그대로 체스판에 둔 채, 그렇게 대꾸했다. 턱을 괸 얼굴이 어딘지 뿌루퉁했다.

“……졌어.”

말도 움직이지 않은 채 카스텔이 항복 선언을 했건만, 츠뮤는 굳이 퀸을 움직여 툭하고 킹을 쓰러트렸다.

“한 게임 더?”
“……아니, 그만두지.”
“별일이네. 당신도 지는 거 끔찍이 싫어했으면서, 그새 성격이 좋아지기라도 했어요?”
“내 성격은 원래 좋은데?”
“아, 어련히.”
“그보다, 공주님 심기가 불편하신 것 같으니까 말이야. 더는 화풀이로 밟히기 싫은 걸.”
“……흐응.”

카스텔의 말을 부정도 않고 츠뮤는 탁자 위를 정리했다. 탁자 위의 체스판이 치워지고 대신 시녀가 가져다 준 차와 간식이 놓인 후에야, 츠뮤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카스텔이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서 며칠 내내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건, 그가 도망쳤기 때문인가?”
“글쎄요.”

불퉁하게 대답하며 쿠키를 와삭 깨문다. 역시 기분이 나쁜 게 맞다. 평소에는 뭔가를 먹을 때 소리조차 내지 않건만.

“대단하더군. 도대체 어떤 수를 쓴 건지, 당시 대기 중이던 옥지기와 경비를 보던 병사들 모두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며? 게다가 그때 사라진 이들은 성에 명단조차 남지 않았다지? 처음부터 모두 한패였단 말인가? 과연 7년간 간악히 성을 지배해온 자다운 지략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게요.”
“그에 공주님… 아니, 우리 폐하께서는 노발대발하며 그간 성 치안과 담당자들의 나태함을 지적, 성의 경비를 한층 더 강화할 것을 명령하고, 그의 수배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다던데? 그때의 분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당시 거기에 있던 자들을 모두 얼어붙게 했다더군.”
“자세히도 알고 있군요. 내부에 밀사라도 심어뒀나요?”
“소문이 자자해.”
“흐음.”
“그런데 말이야…….”

카스텔이 말꼬리를 늘리며 츠뮤의 반응을 기다리자, 그제야 딴 곳을 바라보던 츠뮤가 그를 향해 흘깃 얼굴을 돌렸다.

“근데, 뭐요?”

짜증스러운 듯 눈썹을 살짝 구기는 츠뮤를 긴장한 듯 바라보던 카스텔이, 싱긋 웃어보였다.

“난 어째서 자꾸만, 네가 일부러 그를 놓아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

츠뮤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대신 금빛 눈동자에만 당황함이 가득 차 일렁였다. 아마도 카스텔 정도가 아니었다면 읽어내지도 못했을 감정의 동요. 그것을 내보이고만 츠뮤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댔다.

“아, 씨.”

츠뮤는 그녀답지 않은 의성어를 내뱉으며 축 처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몸을 뒤로 재끼더니, 한참을 그 상태로 있었다. 손바닥으로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그런 츠뮤를 잠자코 바라보던 카스텔이 침묵을 흘러 보내다 입을 열었다.

“……후회할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거야? 해놓고 나니 후회돼서?”
“……아니.”
“아니면, 뒤늦게 그가 복수라도 해올까 봐 염려돼?”
“……아니, 나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럼?”

그 질문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흘렀다. 고요한 공간에 유난히 뚝딱거리며 크게 울리는 시계 소리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대답하지 않으려나. 카스텔이 그렇게 생각할 무렵에야, 츠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제 두 번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인 거 같다는 게…….”

말은 거기서 멎었다. 우두커니 천장을 바라보던 츠뮤가 다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 스쳐 보인 눈시울이 조금 붉다. 다시 손으로 얼굴을 비벼댄다. 저러다 아프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이윽고 손바닥을 뗀 츠뮤는 고개를 들어 카스텔을 바라보더니, 허탈한 듯 웃었다.

“아, 병신 같아.”

덩달아 씁쓸한 미소를 지으려던 카스텔이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날 때부터 쓸 줄 알았어요.”
“거짓말 마.”
“진짜에요. 소문에는 남들 다 응애응애하고 울 때 저는 병신병신하고 울었다던…….”
“……아.”

숨도 못 쉬고 웃는 카스텔을 바라보며, 츠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데 아저씨, 언제가요?”
“왜, 빨리 갔으면 좋겠어?”
“아니, 나야 있으면 좋지만. 당신 왕자에 후계자잖아요. 너무 오래 성을 비우면 곤란한 거 아닌가?”
“……진심? 인사치례?”
“진심. 솔직히 아저씨까지 가버린 이후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고요. 아, 저 지긋지긋한 귀족들 틈에 홀로 끼여서.”
“흠.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정말로 고려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그 말에, 심상찮음을 느낀 츠뮤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묻는다.

“……뭘요?”
“오지 말라시는데?”

츠뮤가 무심결에 들어 올리던 쿠키를 탁자에 떨어트리는 소리가 툭하고 울렸다.

“그건…!”
“아무래도 네게 왕위를 물려주실 생각이 확실히 없으신 것 같아. 이번 기회에 후계자로서의 지위도 아예 박탈해버리실 생각인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렇다면, 아저씨는!”

흥분해 언성을 높이는 츠뮤에게 카스텔은 진정하라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찻잔에 차분히 손을 갖다 대었다.

“대신이라고 말하긴 뭣하지만, 꽤 흥미로운 제안을 해오셨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찻잔에서 입술을 뗀 카스텔이 츠뮤를 바라보았다. 하얀 김 너머, 한 겹 가리어진 온화한 밤색 눈동자로, 조금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볼래?”





돔은 이 부근에서 가장 큰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의 식료품점은 그냥 클 뿐만이 아니라 제법 고급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식료품들을 수완 좋게 비싸지 않은 가격에 구비해놓고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는 단골도 많았다.
돔은 종이쪽지를 하나 들고서 분주히 움직이며 거기에 적힌 물건들을 여기저기에서 꺼내 봉투에 가득 담았다. 그 봉투를 손님에게 건네려다, 멈칫하며 그 손님을 바라본다.

“다 들 수 있겠어, 아가씨?”

아가씨…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린 소녀였다. 자그마한 키에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뺨이 아이처럼 뽀얗다. 그럼에도 은발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는 어른스럽게 침착한 빛을 띠고 있어, 소녀의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 없게 했다.

“문제없어.”

라며 봉투를 받아든 소녀는 그것을 야무지게 껴안았다. 소녀에 비해 거대해 보이는 짐인데도 무표정한 얼굴엔 힘든 기색 하나 없다.

“아가씨, 최근 들어 자주 오네. 게다가 하나같이 최고급의, 비싼 물건들만 사가고. 요즘 아빠가 돈을 잘 벌어오기라도 하나보지?”
“아빠 같은 건 없어.”
“……아, 미안.”
“사과는 필요 없어.”

소녀는 무심하게 대꾸하며 돈을 지불하더니, 퍽 어른스럽게 들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까다로운 생물이 있어.”
“까다롭다면…… 고양이?”
“것보단 훨씬 크지.”
“그것보다 크다면, 치타나 호랑이이라도 돼? 아가씨, 집에서 그런 거 기르다가 자칫하면 잡아먹힌다? 어흥! 하고 말이야.”

농담이라고 한 소리에 웃지도, 겁주려고 낸 소리에 무서워하지도 않은 채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그 반응에 조금 어이가 없어진 돔이 벙벙하게 소녀를 바라보는데, 그 뒤쪽으로 사람들이 한 무리 스쳐지나갔다. 워낙 큰소리로 떠들고 있는지라 저절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왜 갑자기 공주님이 왕위를 물려받으신다는 거야? 그 왕자님은?”
“글쎄, 아무래도 헛소문이었나 보지.”
“에이, 김새네. 그런데 여왕님은 왜 갑자기 돌아가셨대?”
“급환이라고 하시던데…….”
“16세의 어린 공주가 여왕이 된다? 괜찮은 거야?”
“소문에는 그 공주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더군. 그야말로 마녀의 딸이라던데?”
“아이고. 아무튼 이 츠메카린은…….”

그 대화를 말없이 듣다 소녀는 등을 돌려 그들의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물건이 가득 담긴 봉투를 안고선 남들처럼 하얀 입김을 내뱉지도 않고서, 추위에 하얗게 얼어붙은 무채색의 거리를 걸어간다.
소녀가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다른 저택보다는 조금 크지만 대저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크기의 집이었다.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 소녀를 반겼다.

“왔어? 하그.”
“받아.”

청년의 반색에 응하지도 않고 소녀는 무뚝뚝하게 봉투를 건넸다.

“미안. 귀찮았지?”
“알면 시키지 마.”

그렇게 대꾸하며 소녀는 청년을 홱 스쳐지나갔다. 그 뒷모습을 청년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봉투를 하녀에게 건네고는 홀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걸어가더니, 홀 귀퉁이의 나선형의 계단으로 들어섰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수록 주변의 어둠은 농도를 더해갔고, 소리는 잠긴 듯이 고요히 울렸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다다른 곳은 거대한 문 앞이었다. 말없이 그것을 밀자, 끼익하는 낡은 소리와 함께 강한 빛이 새어나왔다.

그 빛의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청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또 여기에 계셨습니까, 왕자님.”

그, 츠키에테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홀의 앞을 응시했다. 그러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들어.”

그곳은 작은 성당이었다. 바닥 위로는 열에 맞춰 기다란 의자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벽에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새겨져 거기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신상이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었고, 그 앞의 교단 위로는 하얀 천이 덮여 고풍스러운 모양의 촛대가 양쪽에 놓여있었다.

“이곳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십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예?”
“지하임에도 사방에 창이 둘러져 있다든지, 그 창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든지, 왜 인간의 땅에 이런 것이 있다든지, 그것도 하필이면 사이버트, 자네의 집에.”

사이버트는 고개를 돌려 츠키에테와 같은 곳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부모님…… 델린퍼 백작께서는, 가능한 여기에 성국의 성당을 비슷하게 구현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지만 츠메카린에서 신앙이란, 금기시되지는 않아도 터부시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드러내놓고 만들 수는 없으셨죠. 그래서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 이런 것을 만드셨는데, 그래도 저 스테인드글라스는 꼭 구현하고 싶다며 지하실의 규모보다 좁은 벽을 만들어 창을 저리 다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빛이 비쳐드는 것처럼 하고자 바깥의 벽에 전등까지 다셨죠.”
“……대단하군.”
“동감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이런 것을 만들고 싶어 하셨나?”
“신을… 믿으셨습니다.”

물어보긴 했으나 예상은 했던 듯, 츠키에테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옅은 조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신이라….”

본래 루네스 에민카렌에서 종교를 가진 나라는 성족의 나라, 성국뿐이었다. 과거에는 인간들의 땅에서도 일부는 종교를 믿었었지만, 성마대전 이후 성국들이 멸망하고 루네스 에민카렌이 쇠퇴하면서 종교도 사라졌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도, 신도 모르고 살다 죽었다. 신이 없는 세계, 그것이 루네스 에민카렌이었다.

“설마, 반역도 그래서?”
“네. 신을 인정하지 않고, 마녀라 불리는 여자가 다스리며 이름조차 마국이라 불리는 이 나라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신도들을 끌어 모아 반역을 일으키려 하셨습니다.”
“신앙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힌 이들은 무슨 일이든 저지른다고 하더군.”
“제 부모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렇군.”

츠키에테는 낮게 웃었다. 오만함마저 느껴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사이버트는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술에 절어 있거나 몸져누워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도, 그는 그전과 다를 바 없이 당당했고, 또 변함없이 오만했다. 그는 여전히 왕다웠다. 그를 구하러 갔던 그날 밤, 이미 성을 빠져나가고 있던 그와 마주치고, 이렇게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되는 동안 쭉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게 걸치고 있는 그저 밋밋한 하얀 셔츠조차 그의 위엄을 누그러트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성에 안 가고 계속 집에 있는 건가?”
“……저 잘렸습니다?”
“……풋.”
“……비웃지 말아주십시오.”

따지고 보면 왕자님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사이버트는 용맹할 때에는 용맹해도 자기 목숨 귀한 줄은 아는 남자였다.

“작위를 박탈하고 성으로의 출입을 금했다. 반역자를 지지한 세력을 숙청하는 방법치고는 온건한 편입니다. 가능하면 츠메카린을 떠나라는 명령도 내리긴 했지만,”
“떠나기가 어려우면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네. 그뿐만이 아니라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지지 세력을 찾아 처단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야 공주님께 검을 겨누기도 했으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으나, 레이넨 후작은 남았습니다. 역시 아직 어린 여자라 과감하지 못한 건지…….”

츠키에테는 말없이 그저 신상을 응시했다. 불빛에 비친 금빛 눈동자가 고요히 일렁인다. 무슨 생각을 하나 싶어 사이버트가 눈치를 살피는데,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자네 여동생은 몇 살인가?”
“하그나스요? 공주님과 동갑입니다.”
“……그 꼬마가?”
“네. 왜인지 자라질 않네요. 하그 이야기는 왜 물으십니까?”
“만약 그 애가 7년간 자네를 속이고 있었다면 어찌 할 텐가?”
“……그건.”

누구를 담고 하는 질문인지 알고 있으니 대답이 쉬 나오지 않았다. 사이버트는 가만히 츠키에테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앞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눈동자 속에 든 것을 헤아리며, 사이버트는 신중히 말을 골라내었다.

“……화가 날 겁니다. 배신감도 들 테고, 용서할 수 없다는 기분도 들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미워하기도 힘들 겁니다. 혈육이란 그런 거니까요.”
“……그래.”

그 대답을 들은 츠키에테는 옅게 호흡하듯 숨을 내쉬었다. 그 미약한 소리를 들으며, 사이버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실, 제 경우는 화를 내기도 뭣 할 겁니다.”
“……왜?”
“하그는 감정이 없으니까요.”

그 말에는 조금 놀란 듯, 츠키에테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자폐증이라고 해야 할까요. 원래도 무뚝뚝한 아이였는데, 부모님께서 그리 되시고 옥에 갇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아예 저리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를 보며 웃지도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지요. 아마 저에 대한 애정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배신을 해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겠죠. 필요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할 겁니다.”
“……그렇군.”

그 말을 들으며 츠키에테는 가끔 스쳐가면서 본, 소녀의 깊고 무심한 푸른 눈동자를 떠올렸다. 어딘지 묘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납득이 갔다.
그리고 그 모습에 겹쳐, 자신을 보며 웃고, 울고, 화를 내던 츠뮤를 떠올렸다.

“……차라리 그런 것이 없었다면 좀 더 쉬워질까.”
“……네?”
“아무것도 아니네.”

츠키에테는 쓰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날 밤은 고요했다. 너무나도 고요했기에, 또렷이 귀를 파고든 그 울음소리가 그대로 귀에 맺혀 사라지지가 않는다. 마치 각인이라도 된 듯, 계속 귓전에 머무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의 옆얼굴을 보며 망설이던 사이버트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일 이곳을 뜰 거라네.”
“떠나시려고요?”
“일단 ‘그곳’으로 가볼 생각이야. 남은 생각은 가면서 해도 되겠지.”
“‘그곳’이라…….”
“한 일주일 걸릴 테지. 그 날에 맞춰 지지 세력들을 소집해놓게.”
“알겠습니다.”
“얼마나 모일 것 같은가?”
“대부분 모이겠지요. 그리 쉽게 배신할 자들을 밑에 두셨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츠키에테는 다시 쓰게 웃었다. 그랬다. 그랬음에도,

“아, 그런데 레이넨 후작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반역 세력에 대한 대처가 온건한 까닭도 이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

“……뭔가?”

사이버트는 조금 망설이다,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카스텔 왕자와 츠뮤 공주님께서, 약혼을 하신다는군요.”

그 말에 돌아서려던 츠키에테가 멈칫했다. 고요하던 그 표정에,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뭐?”

왠지 심상치 않은 반응에 조금 망설이다, 사이버트는 대답했다.

“말 그대로입니다만?”
“아니. 그는 후계자… 곧 왕이 될 자 아닌가? 그런 자와 다른 나라의 여왕이 될 자가 어떻게 결혼 따위를…….”
“현 하텐미온 국왕 폐하께서 카스텔이 가진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고, 츠메카린의 새로운 여왕의 부군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셨다는군요. 동맹국으로서의 재교류를 위한 상징으로선 그것이 가장 좋지 않겠느냐고.”
“왜 그런 짓을…….”
“이래저래 해도 카스텔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싫으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간 국왕이 하는 일에 숱하게 반발해왔고, 그 ‘계약’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이니.”
“그렇다면 왕위는 그 동생이 물려받게 되는 건가? 좀 모자라는 녀석이었는데.”
“그러니 더 적격이겠죠. 자신이 해온 일을 그대로 다 물리기에 카스텔 왕자는 너무 영민합니다.”
“……과연.”
“뭐, 어느 쪽이든 공주님께서 승낙하셔야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그래서 츠뮤는 어떻게 한다던가?”

태연한 듯 묻는 질문에, 역시 아까의 심상찮음은 기분 탓이었나… 라고 생각하며, 사이버트는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서는…….”





“정말로 하실 겁니까?”
“그래. 뭐, 안 될 거 있어?”

옥좌에 앉아 턱을 괸 채로 츠뮤가 아셀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나이차이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고작 18살이야. 실리나 명분만 맞아떨어진다면 설령 어린애와 노인이라도 하는 것이 왕족이나 귀족의 정략결혼이지. 18살 정도면 무난한 거 아닌가?”

아셀이 아연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는지, 츠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더 덧붙였다.

“뭐가 문제야? 난 아저씨… 아니, 카스텔 왕자를 좋아하고, 그도 나를 좋아해. 그럼 된 거 아닌가?”
“그러나, 사랑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사라앙?”

그렇게 되물은 츠뮤가, 자세를 삐딱하게 고쳐 앉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우습네, 아셀. 정략결혼에 그런 게 왜 필요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쩐지 갈수록 성격이 나빠지는 것 같다…고, 아셀은 생각했다. 큰일을 치루고 나니 사람이 변하는 건가. 아니면 그저, 침대 밖으로 나와 걸어 다니다 보니 슬슬 본성이 나오는 건가.

“안 하면 어쩔 건데? 이쪽에는 거부해야할 만한 이유가 없어. 그럼에도 거절한다면 그건 동맹국으로서의 재교류 또한 거절한다는 의사로 그쪽이 알아들어도 무리가 없지. 사실 그 동맹국이란 거, 깨져도 약소국인 츠메카린이나 아쉽지, 대국인 저쪽으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어. 옛 국왕끼리의 의리라고는 하나 이제는 규모에서 이리 차이가 나니, 하텐미온으로서는 영 수지가 맞지 않지. 그런 성가신 것을, 카스텔 왕자가 멋대로 가서 도로 이어놓은 거야. 알겠어? 어느 쪽이라도 하텐미온 국왕으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어. 결과는 둘 중 하나니까. 이참에 눈의 가시였던 카스텔 왕자를 치워버리던지, 이참에 가뜩이나 귀찮았던 츠메카린과의 동맹을 끊어버리던지.”
“그러나 공주님께서 그렇게까지 인생을 희생하실 이유는…….”
“아셀, 아셀. 난 그렇게 훌륭하지 않아.”

츠뮤는 답답하다는 듯 옥좌에 기댄 채 팔걸이를 두들겼다.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아래를 내려다본다.

“굳이 사랑이 아니라도 단지, 내가 그를 곁에 두고 싶은 것뿐이라면?”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아셀은 괴로운 듯 물었다.

“……휴식처가 필요하신 겁니까.”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츠뮤가 미간을 찌푸렸다.

“휴식처? 무엇에 대한?”
“저희에 대한.”
“왜?”
“저희를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츠뮤가 눈가를 움찔 떨며 표정을 굳혔다. 츠뮤는 그대로 몸을 숙여 아셀을 노려보며 낮게, 으르릉대듯 말했다.

“그래. 아주 싫어. 그래서, 불만이야?”
“아니, 불만 따위는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드릴 일이죠. 그토록 싫어하는 저희를 배신하지 않아주시다니.”
“그건 나도 참 감탄스러워. 빌어먹게도 말이야.”
“원하신다면 저희는 이제 성을 떠나 공주님 앞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지?”
“저희가 보기 싫으신 거라면 기꺼이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에게 매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실리니 명분 같은 것에 희생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까지 해주셨으면 됐습니다. 이제는 원하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츠뮤는 어이없다는 듯 아셀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더없이 진지했다.

“이제 와서?”
“이제부터라도.”

츠뮤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뭘? 이제부터라도, 도대체 무엇을?

“마치 자신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트린 고양이를 동정하며 생선을 던져주는 격이군. 죄책감을 상쇄시키는, 아주 멋진 자기만족 방식이야. 기꺼이 감탄해주지.”
“……공주님.”
“알아? 고양이는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가는 법 따위는 몰라. 이제는 싫어도, 절벽 아래에서 살아야 해. 그렇게 되도록 밀어놓고 이제와 도망치는 것은 내가 용납 못하지. 최소한, 구경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공주님.”
“저런, 아셀. 내가 말했잖아?”

아셀을 내려다보며 츠뮤는 오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또렷이 명령했다.

“폐하라고 부르란 말이야.”





어릴 적 츠뮤가 즐겨 읽던 동화에서 나오는 마왕의 성은, 죽은 가시덤불들이 무성히 얽힌 검은 성이었다. 진회색 구름 사이에서 번쩍이는 천둥, 성에 휩싸인 검붉은 기운이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곳. 동화에 불과한 이미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관념처럼 박혔었는지, 츠키에테는 처음 이 성을 멀찍이서 보았을 때는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암흑성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또렷이 보이는 성의 형상은 더욱 기묘했다. 높지 않은 성벽의 둘레로는 맑은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위로는 옅은 색의 나무로 지어진 다리가 놓여 있었다. 상아로 만들어진 듯 은은한 흰빛을 발하는 건축물 둘레를 에워싼 큰 나무들은 꼭 성을 숲에 파묻힌 것처럼 보이게 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나무들이 잎도, 가지도 태워낸 것처럼 새하얗다는 것이었다.
기묘했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홀릴 듯 아름다운 성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겉모습 따위에 홀리는 것도 새삼스러울 정도로 익숙한 성이 되었다. 이제는 처음처럼 어눌한 감탄사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저 성을 바라보며 짙은 조소를 머금었다.

황폐한 바람이 불어왔다. 몸도 마음도 바싹 메마르게 할 듯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마치 계절이 죽음의 계절이라 불리는 13월에 들어선 것처럼 살아있는 것을 바싹 조여 오는 공기가 주변을 짓눌렀다. 11년 전에 느꼈던 것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해졌을지도 모른다. 단지 자신이 이 공기와 좀 더 닮은 것으로 변했기에 느끼지 못할 뿐.

츠키에테는 말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이델로즈.”

성 앞 다리 위에, 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하늘거리는 새하얀 원피스를 두른 자그마한 소녀는 그야말로 요정 같았다. 츠키에테가 소녀의 이름을 부르자, 소녀는 커다란 붉은 눈동자로 그를 돌아보았다. 긴 흑발을 나부끼며 츠키에테를 응시하던 이델로즈는 이내 방긋 미소 지었다.

“어서와. 츠키에테.”
“오랜만이군.”
“일찍 왔네.”
“……일찍?”
“폐하께서는 네가 3일후에나 오실 거라고 하셨거든.”
“……아아.”

역시 알고 있었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츠키에테는 앞서 나가기 시작한 이델로즈를 따라 들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푸른빛이 도는 웅장한 홀이었다. 투명한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대형 샹들리에들이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 줄지어져 섬세하게 깎인 반투명한 조각들 너머로 강렬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에 새하얀 색의 벽과 기둥과 바닥이 푸르게 빛난다. 그 위를 장식하고 있는 은빛 세공은 한층 더 순도 높은 색으로 반짝였다.

“폐하, 그가 왔어요.”

앞서 걸어 나가며 낭랑한 목소리로 이델로즈는 말했다.

츠키에테는 그녀를 따라가며 눈부시기 그지없는 하얀 융단을 밟았다. 그 하얀색을 보고 있으니, 변함없는 악취미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버린다. 이토록 흰 빛깔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공이 필요할 텐데 4년 전과 비교해 때 탄 구석 하나 없었다.

그 하얀 융단의 끝에, 그가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옥좌에 앉은 하얀 마왕, 카민 하르타로스 이프로체닉 갈립소 시렌카이츠.

백은색의 머리카락 아래, 마르고 긴 몸은 하얀 물감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새하얗다. 그 몸에 두른 옷도 같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불에 걸린 은귀걸이 역시 은빛이라기보다는 하얀색에 가까운 빛을 띠며 반짝이고 있었다.

왕에게 무릎을 꿇어 예를 올리는 대신, 츠키에테는 그저 그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여전히 피 냄새가 가득 찬 성이로군요.”

미동도 않고 시렌카이츠는 대꾸했다.

“싫은가?”
“썩 좋지는 않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유감이군.”
“아직도 인간이라는 것의 각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노력해라. 넌 몇 되지 않은 원형이니까.”
“아직까지도 산 생명들로 갖은 실험을 하고 계십니까?”
“무익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시렌카이츠는 턱을 괴고 오만하게 츠키에테를 내려다보더니 미소 지었다.

“그대 같은 작품이 나오는 일도 있으니 말이야.”
“……그렇군요.”

츠키에테가 희미한 조소로 답하자, 이번에는 시렌카이츠가 피식 웃었다.

“꽤 못난 일을 당한 모양이더군.”
“송구스럽게도 그리 되었습니다. 실망하셨습니까?”
“뭐,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봐줄만해. 적어도 현재 후보들 중에서는 그대가 제일 나으니. 그토록 잘 만들어진 환경에서 그토록 존재를 부정당하고 미움 받으며 자라, 양분과도 같은 증오를 듬뿍 머금어 가장 개화된 어둠의 꽃을 피워낸 악의 씨앗이지. 그대가 7년간 보여준 일만해도 충분히 놀라운 것이었으니.”

시렌카이츠의 곁에 바싹 붙어있던 이델로즈가 어리광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폐하, 제 아들은요?”
“그 녀석은 너무 게을러서 글렀어.”
“……쳇.”

토라져 뺨을 부풀리는 이델로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렌카이츠는 다시 츠키에테를 바라보았다.

“3일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급하게 달려온 모양새를 보니 앞으로 어찌할 지는 묻지 않아도 되겠군. 잠시라도 편히 기운을 취하다가게. 아니면 혹시, 복수가 어려워 내게 도움이라도 청할 생각인가?”
“아니, 그건 어렵지 않지요. 오히려 너무 쉬워 고민입니다.”
“고민이 아니라 망설임이겠지. 넌 여전히 그 애에게 얽매이는군. 좋지 않아.”

시렌카이츠는 웃었으나, 츠키에테는 웃지 않았다. 대신 진지하게 물었다.

“……시간은 이제 얼마나 남았습니까?

시렌카이츠는 느긋하게 팔을 들어, 파리한 자신의 손목을 흘깃 들여다보더니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이제 1년도 채 남지 않았어.”
“그렇군요…….”

조금 초조한 듯한 츠키에테의 중얼거림에 시렌카이츠는 짙은 조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할 수 있겠는가?”
“해야지요.”

츠키에테는 단호하게 대답하더니, 그와 닮은 조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오른쪽 눈과 닮은 금안이, 그와 비슷한 온도를 머금고 싸늘하게 번뜩였다.

“당신과의 약속대로, 아버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사이버트의 집에 마땅히 넓은 홀이 없다보니 장소는 지하의 성당이 되었다. 중앙에 빽빽이 들어찬 의자에 자리 잡은 귀족과 기사들을 둘러보며 홀을 가로질러 신상에 다다른 츠키에테는, 그 신상을 올려다보며 조소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어쩌자고 이런 모양새가 갖춰졌단 말인가. 츠키에테는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인지도 모를 조소를 띠우며, 양각으로 새겨진 신의 조각을 등졌다.

“레이넨 후작, 자네의 수하에는 병력이 얼마나 남아있지?”
“만 명입니다.”
“펠렌 자작, 자네에게는?”
“오천 명도 남지 않았습니다만,”
“히스미덴 기사단에는?
“역시 오천 명 남짓입니다.”
“그 외의 잔 병력들을 긁어 모우면 이만 명은 되겠군.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성이 가진 병력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만?”
“누가 싸우는데 충분하다고 했나? 모양새를 갖추는 데에 충분하다고 했지. 어차피 이건, 그 아이와 나의 대결이 될 테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무게에도 아랑곳없이 츠키에테는 느긋하게 등을 돌려, 교단으로 걸어가 촛대의 초를 만지작거리며 표정에는 조소를 걷어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이넨 후작이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로, 하실 겁니까?”

그 말에 츠키에테는 돌아보지도 않았고,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계속, 불이 켜지지 않은 초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줄곧 악몽을 꾸곤 했다. 잠에서 깬 후에도 한동안 진정 할 수조차 없이 그저 소녀를 울게만 만드는, 그런 악몽이었다. 그 악몽이 무엇인지 그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날, 소녀는 악몽을 꾸지 않았는데도 울었다. 그는 소녀가 우는데도 달래주지 못했다.
그날 밤은 고요했다. 너무나도 고요했기에, 또렷이 귀를 파고든 그 울음소리가 그대로 귀에 맺혀 사라지지가 않았다. 마치 각인이라도 된 듯, 계속 귓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래.”

무거운 침묵이 깔린 홀에,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전쟁이다.”

똑똑히 알게 해줘야겠지. 바보 같은 내 여동생에게.
이 나라가 누구의 것인지,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 새장 밖이 얼마나 혹독한 곳인지를.

이윽고, 초에 불이 붙었다. 촛불에 비친 금안이 고요히도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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