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분개하여 소녀에게 검을 들고 달려든 것은 평소에도 다혈질인 사이버트였다.

순간 츠키에테는 상황을 잊고 츠뮤를 구하기 위해 한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츠뮤는 우습다는 듯 몸을 돌려 그 공격을 피했다. 놀랄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곧이어 얇은 레이피어의 검날과 대검이 부딪쳤다. 아니, 부딪치는가 싶더니 빠르게 비켜나며 아래를 쳤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의 범위에서 벗어난 사이버트가 다시 대검을 휘둘렀지만, 검날은 맥없이 공중을 갈랐다. 츠뮤는 매섭게 틈을 치고 들어왔다. 사이버트의 검이 그것을 막고, 다시 공격. 그런 식으로 보는 사람을 아찔하게 하는 공방이 계속되었다.

날렵한 몸놀림, 가히 정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을 능숙한 검술. 한참이나 그 대련을 지켜보면서도 츠키에테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상대는 사이버트. 츠키에테나 아셀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도 츠메카린에서는 알아주는 검사였다. 그 사이버트가, 침대에만 머물러있던 병약한 소녀를 상대로 한참을 대치하고 있었다. 심장이 안 좋아, 격하게 움직일 수도 없다는 저 아이를 상대로.

‘……심장이 안 좋아?’

거기까지 생각한 츠키에테는 뭔가를 깨달은 듯 크게 열린 동공을 파르르 떨었다.

‘저 아이가 심장이 안 좋다는 말은, 누가 했었지…?’

츠키에테는 그제야 발견했다. 츠뮤의 뒤에 서있는 이세느를.
공주님은 연약하다고 강조하며, 조심해서 대해달라며 늘 신신당부하던 그 주치의가, 검을 휘두르고 격하게 움직이는 츠뮤를, 지독할 정도로 변함없는 차분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속였던 거지? 어디까지 속였던 건가?’

순간 날카롭게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홀에 울렸다. 츠뮤의 검이었다. 사이버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러 치고 들어 왔다. 진건가? 츠키에테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츠뮤의 반대쪽 손바닥에 하얀 섬광이 일었다. 검을 놓쳤던 것은 속임수였다! 츠키에테의 짐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츠뮤는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손바닥의 마나를 모았다. 굳이 기척을 세워 흐름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격렬한 마나의 소용돌이였다. 마치 포효하는 듯한,

‘그래. 고작 9살 때 회복 마법을 익힌 아이다. 다른 마법이라고 쓰지 못 할리 없다!’

눈 깜짝할 새 얼음 결정이 사이버트에게 세차게 내리꽂히며 산산이 깨어진 얼음의 파편들을 주변에 흩날렸다. 츠뮤는 바닥에 쓰러진 사이버트를 힐긋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츠키에테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앞에 서서, 그를 향해 레이피어의 검날을 겨누었다. 낯익지만 동시에, 한없이 낯선 눈동자가 그를 바라본다.

츠키에테는 아연히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서있는 것은 새장의 어린 새도, 온실속의 여린 꽃도 아니었다. 어딘가에 살짝 부딪치기라도 하면 금세 깨져버릴 듯 아슬아슬하고 불안해 보이는 연약한 소녀도 아니었다. 세상의 더러움도 악도 모른 채 착하고 고결하게 자란 새하얀 천사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성에 갇혀,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진 공주님은 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소중하디소중한, 전 세계를 뒤진다 해도 더는 없을, 고귀하고 아름다운,

츠메카린의, 정당한 여왕 후계자.

“자, 오라버니.”

츠메카린 츠뮤는, 그를 향해 얼음처럼 싸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검을 버리고, 무릎 꿇으세요.”





싸늘한 밤이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하늘 가운데에는 시린 색채로 선명히 그어진 달이 있었다. 모든 것을 잡아 삼킬 듯 강렬하면서도 모든 것을 어루만져주듯 은은한 달빛이 대지를 천천히 가로지르다 은밀하게 소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디선가 차디찬 바람이 한줄기 불어왔다. 소녀는 손으로 팔을 꼭 감싸 웅크리며 어린 몸을 떨었다

냄새. 어딘가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소녀는 홀린 듯 그를 쫒아 발걸음을 옮겨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점점 더 자욱한 어둠속으로.

불현듯, 소녀가 밟고 있는 바닥이 촉촉해졌다. 발가락 사이로 뭔가가 스며들었다. 진득하게 소녀의 피부에 엉겨 붙는 뜨거운 액체였다. 그 액체가 무엇인지, 어둠 탓에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던 소녀로서는 당장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달빛이 새어드는 창가에 ‘그것’이 있었던 까닭에, 소녀는 알게 되었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것.

그것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츠뮤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셀이 불만 어린 얼굴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안, 대화하던 중이였지. 깜빡했어.”
“요즘 툭하면 다른 생각에 빠져 계시네요.”
“미안. 하지만 잔소리는 금지.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봐.”
“아시다시피, 이제 3일후입니다.”

츠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텐미온 쪽에서 연락은 왔습니까?”
“응.”
“새를 통한 서신이라…. 확실히 이 방법이라면 들킬 염려 없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만, 솔직히 전 좀 불안해했었는데……. 정말이지 용케 닿았군요. 공주님께서 새를 잘 다루셔서 다행입니다.”
“그거, 내가 순수해서 그런 거래.”

츠뮤는 입술을 누르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농담이었는데도 아셀은 정색했다.

“……공주님.”

……빡빡하긴… 이라고 작게 투덜거리며, 표정을 가라앉힌 츠뮤가 눈앞의 서류를 들어보았다.

“히센 공작의 지지 확보를 마지막으로 귀족들과의 접선은 일단락인가?”
“네. 더는 위험합니다.”
“좀 아쉬운데…….”
“그렇다면 밀렌 백작은 어떻습니까? 츠키에테 님께서 매수해놓지 않았다는 것이 거의 확실한 사람인데.”
“그는 고지식하고 맹목적이지. 이런 부조리한 싸움에 몸을 담을 위인이 아냐.”
“……츠키에테 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군요.”
“그래?”

츠뮤는 쓰게 웃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셀이 진지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역시 여기서 그만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츠키에테 님께서 매수해놓은 귀족이 꽤 많아서……. 워낙 의심이 많은 분이신지라, 측근인 저에게도 그 명단을 공개하지 않으십니다. 누가 그의 편이 되어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섣불리 접선을 시도했다가 걸려들면 끝장 아닙니까. 여기까지도 정말 아슬아슬했지요. 사실 저는, 히센 공작도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전에도 말했지만, 난 레이넨 후작까지도 해볼만 하다고 생각하는데.”
“안 됩니다. 정말… 정말이지, 왜 그렇게 아슬아슬해 보이는 귀족들만 고르시는 겁니까! 덕분에 전 접선을 시도할 때마다 기도라도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히센 공작 때는 종교라도 가져 볼까 싶었을 정도였다고요!”
“아셀은 너무 소심하다니까. 그래서야 어디 큰일 하겠어?”
“공주님이 너무 무모하신 겁니다! 도대체 그 무모함은 어디서 나오시는 겁니까?”
“글쎄, 타고난 성격?”

쿡쿡 소리 내어 짓궂게 웃는 츠뮤를 보며 아셀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아셀을 바라보며 츠뮤는 다부지게도 말했다.

“하지만 틀린 적도 없잖아?”
“……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덕분에, 이제 반수에 가까운 귀족과 기사단들의 지지를 확보했어요.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괜한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 레이넨 후작은 포기해주십시오.”
“충분하진 않지. 혹시라도 발발할지도 모를 내전까지 대비하려면…….”
“이게 내전이 된다면 어차피 레이넨 후작 정도로는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겁니다.”
“오랫동안 변방을 책임져온 자라 츠메카린의 귀족 중에서는 드물게 전쟁에 능숙해. 휘하에 강한 병사들도 거느리고 있지. 제법 도움이 되리라보는데.”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마는……. 아시지 않습니까. 츠키에테 님은 마법사이십니다. 일반 병사들이 아무리 강해봤자 마법 앞에서는 방도가 없지요. 그러니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실질적으로는 츠키에테 님과 당신의 대결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희로서는 공주님밖에 믿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그럴 일은 없기를.”
“네. 기도하는 수밖에요.”
“그래. 부디, 내가 그에게 겨누게 될 것이 검만으로 끝나기를.”

츠뮤는 잠시 입술을 다물고, 자신의 무릎을 꽉 그러쥐며 앞을 노려봤다. 그러다 이내 힘없이 웃었다.

“오늘은 이만, 오라버니가 오고 계셔.”
“……여전히 귀가 밝으시네요. 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오라버니는 내게 오실 때는 일부러 소리를 내곤 하시니까…….”

첫 번째 계단. 그것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는 소녀의 표정에서는 감출 수 없는 쓸쓸함이 배여 나오고 있었다. 아셀은 그런 츠뮤를 바라보며,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3일후입니다. 괜찮으세요?”
“응. 내가 괜찮지 않을 것이 뭐가 있겠어?”

츠뮤는 그저 웃어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분을 사랑하시잖아요?”

그 말에 그만, 표정이 굳어버렸다.





싸늘한 밤이었다. 모든 것을 잡아 삼킬 듯 시야를 내리감는 강한 달빛이 차갑게 소녀의 몸을 훑어갔다. 문득, 어디선가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느낀 소녀는 그 냄새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냄새를 쫒아갔다. 불현듯 바닥이 촉촉해졌고,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액체가 뜨겁고도 진득하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 액체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지만, 하필이면 달빛이 새어드는 창가에 ‘그것’이 있었던 까닭에, 소녀는 알게 되었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그것.

그것은…….

어마마마의, 잘린 머리였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늘 아름답고 우아했던 여왕의 얼굴은 목이 잘린 채 머리만 남아 금발의 긴 머리카락에 뒤엉켜 무참히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직 잘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듯 흥건히 흘러나오며 고이는 피 웅덩이가 생생한 피비린내와 함께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듯했다. 붉고, 잔혹한 괴물.

“……읍!”

그리하여 슬픔이나 공포 이전에 소녀에게 엄습해온 것은 구토감이였다. 소녀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려는 것을 뒤에서 튀어나온 큰 손이 저지했다. 손의 주인은 소녀를 타이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공주님. 공주님께서 이 광경을 목격한 사실을 알면, 그자… 여왕님을 살해한 자는, 당신까지 죽일 겁니다.”

낯익은 큰 손과 낯익은 목소리에,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카닉?”
“네. 따라오세요.”

소녀는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내딛으려다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아카닉은 말없이 소녀를 안아 올렸다. 소녀는 그 작은 몸이 견뎌내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고통들을 ―터져버릴 듯이 울리는 고동을, 온몸의 떨림을, 치솟아 오르는 구토감을― 애써 억누르며 그의 품에 안겨 긴 복도를 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카닉은 소녀를 침대 위에 앉히고는 말없이 서랍에서 천을 꺼내 꿇어앉아 소녀의 발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다.
그 천에 묻어나오는 것이 붉지 않았다면 방금 본 것은 그저 꿈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로 깊고, 평화롭고, 고요한 밤이었다. 하지만 잠시 동작을 멈추고 어깨를 떠는 그의 눈가가 하얗게 빛나고 있어, 소녀는 아까의 광경이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말도 없이 여왕을 지켜온 여왕의 기사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으리라는 평판을 듣는 저 무뚝뚝한 사람이, 어깨를 떨며 울고 있었다.

어느새 츠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마마마는, 정말로 죽은 거다. 그것도 살해당해서,

“잘 들으세요. 공주님.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앞으로 그 무엇을 보게 된다 해도,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세요. 그렇게 하면 그자는, 적어도 당장은 당신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명심하세요, 공주님.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반드시 살아남으셔서, 여왕 폐하의, 어머니의 복수를…….”
“아카닉… 그자란?”

소녀의 질문에 여왕의 기사는 잠깐 망설이다, 낯익은 이름을 입에 담았다.

“츠메카린 츠키에테. 당신이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자입니다.”

그 울림에 소녀의 금안이 크게 흔들렸다.





  아카닉이 죽은 것은 그로부터 고작 3일 뒤였다.

그가 죽는 것을 츠뮤는 창가의 뒤편에 서서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아카닉은 츠메리카보다 더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공개적인 사형이라는 방법으로. 그는 반역자로 몰려 산산이 찢겨 죽었다. 그 충직하던 사람이 반역자라니.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츠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목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구토를 하며 갖은 격한 감정들과 싸우고 무력함에 짓눌리며 밤마다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렸다.

아카닉의 시체는 여기저기에 버려져 개의 먹이가 되었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죽음이었다. 재산도 가족도 친척도 모두 말살되었다. 역사에 남았을 이름도 함께 찢겨갔다.  그는 그렇게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 듯 보였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이 하나 있었다. 복수의 계획.

그 계획을 그대로 이어간 것은 츠메카린의 또 다른 왕위 후계자이자, 여왕을 살해한 자의 어린 여동생이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여전히 사이좋은 남매였고,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은 여전히 온화했다. 하지만 그 여전한 것들이, 그 밤을 경계로 거짓된 것이 되었다. 그 밤을 경계로 츠뮤의 오라버니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자가 되었고, 츠뮤가 복수를 해야 할 자가 되었다.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츠키에테가 츠뮤의 어머니를 죽인 자이고 츠뮤가 비참하게 죽은 그녀의 딸인 한은,
츠키에테가 반역자이고 츠뮤가 츠메카린의 왕족인 한은,
정의를 지키려다 죽은 여왕의 기사 아카닉의 유언이 츠뮤를 속박하고 있는 한은,

무엇보다, 츠뮤가 그 잔혹한 밤을 잊지 못하는 한은.





“그래.”

두 번째 계단이 끝났다. 표정을 풀며, 츠뮤는 쓸쓸히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만큼 증오도 하지.”

앞으로 열 걸음 정도. 이제 곧 복도를 지나 문 너머에 설 자신의 오라버니를 그리며, 츠뮤는 차분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로, 너희들을 배신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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