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후. 후계자의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거대하고도 화려한 여왕의 홀을 길고 곧게 가로질러 옥좌 아래까지 뻗어있는 푸른 융단을 밟고, 검은 예복을 두른 긴 흑발의 청년이 나아간다.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홀 양편에는 귀족들과 기사들이 가득했지만, 그 인원이나 홀의 위용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그는 당당하게 걸어갔다. 부드럽게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단정하고 품위 있는 얼굴, 검은 망토가 펄럭이며 내보이는 고급스러운 푸른 비단. 왕위를 이어받을 자에게 어울리는 기품과 위엄이 그에게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아가는 푸른 선의 끝에, 츠메카린의 여왕이 있었다. 옥좌에 앉은 채 여왕은 자신의 후계자가 걸어와 계단 아래에 서서 한쪽 무릎을 꿇어앉는 것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옥좌의 계단 앞에 섰다. 입술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그 틈에서 억양 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츠메카린의 27대 여왕인 나, 츠메카린 츠메리카가 나의 아들, 츠메카린 츠키에테에게, 시초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유구하고도 위대한 권위를 물려줄 것을 약속하고 공표하니, 이제 그는 정식으로 츠메카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되어 자신의 이름과 후계자로서의 이름. 이 자랑스러운 2개의 이름을 걸고서, 생명이 사라져도 변치 않을 절대적이며 영원한 신의의 명세를 백성들에게.”

말을 마친 여왕은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왔다. 자신의 후계자 앞에 서서, 그에게 후계자의 증표인 검을 내민다. 후계자, 츠메카린 츠키에테는 그 검을 두 손으로 받들며 일어섰다.

“츠메카린의 제1왕자 츠메카린 츠키에테, 이제 츠메카린의 28대 왕이 될 자가 되어 백성들에게 생명이 사라져도 변치 않을 절대적이며 영원한 신의의 맹세를.”

츠키에테가 검을 뽑아들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간간히 자신의 이름과 칭송, 축하의 말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으며 츠키에테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여왕이 연설을 할 차례였다. 여왕은 다시 옥좌로 돌아가 앉았다.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여왕의 말을 기다렸다.

“이제,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후계자. 츠메카린 츠키에테는, 정식으로 후계자가 된 기념으로…….”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친히 병력을 이끌고, 동쪽의 라비아를 치러가도록 하여라.”
“……여왕 폐하!”

홀을 메우고 있던 인원이 크게 술렁였다. 츠키에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건… 전쟁을 일으키라는 말씀이십니까? 어마마마?”
“뭐, 그런 셈이지.”

여왕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귀족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아우성처럼 터져 나왔다.

“……전쟁이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도대체 왜 전쟁을 일으키시겠다는 건가?!”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그 아우성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왕은 태연하게 말했다.

“내, 전부터 라비아가 탐이 났지. 워낙 약소국이니 충분히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는 귀족들 틈에서 레놉시스 밀렌 백작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허나 여왕 폐하, 츠메카린에는 그럴 수 있을만한 병력이 없습니다!”
“왜 없느냐? 가진 병력을 모조리 끌어 모운다면 그만한 소국은 충분히 칠 수 있을 것이야.”
“그 정도의 병력을 빼낸다면 성은 텅 비게 됩니다! 안 그래도 대마국의 압력 아래 아슬아슬한 츠메카린입니다! 그 사이 대마국이라도 쳐들어온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대마국이 쳐들어온다면 어차피 지금 병력으로도 어림없지.”
“그래서 그들에게 나라를 거저 내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 사이에 그들이 반드시 쳐들어온다는 법이라도 있느냐?”
“만약, 정말로 그리된다면 어쩌시겠냐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은 그 때가서 생각하면 돼!”
“여왕 폐하!!!”
“건방진 것. 한 번만 더 내게 거역하면 내, 당장 이 자리에서 네 목숨을 끊겠다!!”

여왕의 노성이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할 말을 잃은 밀렌 대신 나선 것은 발토니아 기사단의 단장이자 자작, 칸이었다.

“왜입니까, 폐하? 도대체 왜 이런 시기에 전쟁을…….”

여왕은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대답했다.

“라비아가 탐이 나기 때문이지.”

“왜입니까? 그 나라에는 비옥한 땅도, 풍족한 자원도 없습니다. 좁고 지리상의 이점도 없는 국토를 가진, 그저 가난한 소국일 뿐인데…….”
“누가 그런 것이 탐난다고 했느냐?”
“그럼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리 욕심이 나셔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폐하?”

그 질문에 여왕은, 사악한 조소를 머금었다.

“처녀다.”
“폐하!!”
“라비아는 예부터 아름다운 처녀가 많은 곳이지. 이제 츠메카린에서는 피가 마르다시피한, 젊고 아름다운 처녀 말이다. 나는 그것이 필요해.”

그 말에 비명 같은 파장이 퍼져나갔다. 그들 중 가장 충격 받은 표정을 지은 것은 다름 아닌 밀렌이었다.

“이… 이 마녀가!!”

분을 이기지 못한 밀렌이 기어이 그렇게 외치자, 여왕 역시 노성을 질렀다.

“방금 뭐라고 지껄였느냐? 네깟 것이 감히 무엄하게…!!”
“마녀라고 했다. 내 딸, 내 딸도 네가 죽인거지?! 이 살인마야!!!”
“……네 딸?”

여왕은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되물었다.
밀렌 백작이 딸을 애타게 찾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그의 딸 역시 여왕에게 살해당했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사실 그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에, 왕가를 거역하지 않고 여왕 밑에 계속 있던 터였다. 지금 이때까지는.
여왕은 그런 그를 비웃듯 입가를 올려 짙은 조소를 지었다.

“……아아. 그 비명이 유난히 짜증스럽게 울리던 처녀 말이로군. 참을성이 없는 계집이었지. 아빠, 아빠하며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던지.”

그 말에 새하얗게 질려있던 밀렌의 얼굴에서 결국 불꽃이 튀었다.

“죽여 버릴 테다, 이 마녀!!!”

검을 뽑으며 여왕에게 달려가려는 그를 여왕의 바로 앞에서 츠키에테가 붙잡았다.

“……진정하십시오. 백작님.”

밀렌은 자신을 붙들고 침착하게 말하는 츠키에테를 넋이 나간 얼굴로 응시하다 울부짖었다.

“왕자님. 아아, 왕자님! 이게, 이게 도대체 진정할 일입니까?! 저 마녀가, 저 마녀가 제 딸을!!”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으아아아아!!!”

그의 피맺힌 절규에, 그들을 둘러싼 귀족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분개한 눈으로 여왕을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발화점 같은 기류가 홀에 흘렀다. 그럼에도 여왕은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여전히 곧게 서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츠메카린 츠메리카. 천사처럼 아름답고, 마녀처럼 사악한 여왕.
숱한 목숨을 집어삼키며 츠메카린을 폭정으로 지배해온 여자.

어느 순간, 밀렌이 절규를 멈추더니 츠키에테를 다급히 붙잡았다.

“……왕자님! 부탁입니다. 제발 저 대신 저 마녀를 죽여주십시오! 당신이라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저 마녀를 죽이고, 츠메카린의 어진 왕이 되는 일이!! 이제 당신은 츠메카린의 당당한 왕위 후계자십니다! 여왕이 죽으면 곧바로 왕이 되시면 됩니다!! 저희는 아무 말 않겠습니다! 오늘 생긴 일에 대해서는 모두들 함구할 겁니다! 아무도 왕자님께 죄를 묻지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간청 드립니다! 제발, 제발 그 검으로 여왕을 찔러 죽여주십시오!!!”

밀렌의 애원에, 츠키에테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여전히 넋이 반쯤은 나간 듯한 밀렌 백작은 아랑곳도 않고 등을 돌려 귀족들을 향해 외쳤다.

“행여, 있다면 나와 보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 츠메카린의 정당한 왕위 후계자가 폭정과 살인을 일삼는 저 사악한 마녀를 죽이고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이가 있다면!”

귀족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동의하는 말이 구석구석에서 터져 나왔다. 파장이 퍼져가듯, 그 소리는 점차 커졌다. 어서 죽이라고 대놓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이까지 나타났다.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츠메카린 츠키에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겁니까?”

츠키에테는 무겁게 고개를 돌려 여왕을 바라보더니, 나직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어마마마.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그래.”

여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츠키에테는 잠시 안색을 굳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밀렌 백작의 영애를 해하신 것도, 그간 숱한 처녀들을 살해해온 것도, 정말로 어마마마이심을 부정치 않으십니까?”
“그래.”

그 대답을 들은 츠키에테는 괴로운 듯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검을 빼어들었다. 여왕은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듯, 새하얗게 질려서는 안면 근육을 파르르 떨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네가, 네가 정말로 나를, 네 어미를 죽이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츠키에테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자신이 뽑은 검을 바라보다 무겁게 고개를 돌려 여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용서하십시오. 어마마마.”
“……네, 네가 감히!!”
“부디 저 세상에서라도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 모든 것은 츠메카린을 위해서입니다.”
“너!!!”

여왕의 비명 같은 외침이 홀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울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이 그 누구도 여왕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 차갑지만 팽팽한 방관과 동조 속에서, 츠키에테는 검을 들었다.
검 뒤편으로, 얼음 같이 차가운 조소가 비쳤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그가 구상한 이야기대로였다.
그때까지는,

그의 검이 여왕을 내치려는 찰나,

“큰일 났습니다! 왕자님!!”

사이버트가 문 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뭔가?”

츠키에테는 성가신 표정을 감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그게!”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홀의 문이 열리며 그 너머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푸른 융단을 밟고 앞으로 걸어왔다. 어깨까지 닿는 진갈색 머리, 발끝까지 내려오는 하얀 예복. 기품 있고 온화한 얼굴,
그의 얼굴을 확인한 일부 귀족들이 술렁였다. 그곳에 서있는 것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츠메카린의 오래된 대신들은 익히 아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투명한 안경 너머로 비치는 밤색 눈동자로 차분하게 홀을 둘러보더니, 친근하면서도 위엄 있는 말투로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츠메카린의 귀족 분들. 하텐미온의 제1왕자, 하텐미온 페이버티니아 온 카스텔. 인사드립니다.”





하텐미온 페이버티니아 온 카스텔은 푸른 융단을 밟고 천천히 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새하얗게 질린 츠메카린의 여왕과, 검을 들고 있는 츠메카린의 새로운 후계자와, 그들을 둘러싼 츠메카린의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조금 소란이 일고 있었던 것 같군요.”

카스텔이 그렇게 말하며 츠키에테에게 다가오자, 츠키에테는 검을 거두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와 마주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텐미온의 왕자님?”
“우연히 지나가던 차에 후계자 임명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히 축하를 전하고자 들렀습니다. 츠메카린과 하텐미온은 오래된 동맹국이니까요. 7년 전부터 일방적으로 교류가 끊어져서, 이상하게 여기고는 있었습니다만……. 그렇기에 더욱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미리 전갈도 드리지 못한지라 제가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행여 성이 혼란스러워져 임명식을 망치게 될까 염려되어, 식에는 말없이 참석하고 뒤에 따로 축하를 드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츠키에테는 쓰게 웃었다. ‘우연히’라는 말을 믿을 정도로 그는 우둔하지 않았다.

“누구의 전갈을 받고 오셨죠?”
“……역시, 듣던 대로 예리하시군요.”

카스텔 역시 쓰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츠키의 어깨 너머에 서있는 한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저기, 아셀 경입니다.”

츠키에테는 그 시선을 쫒아 아셀을 노려보았다. 늘 그렇듯, 자신의 뒤에 무표정으로 서있는 그를.

“……하.”

기가 막힌 듯, 츠키에테는 웃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도 함께 들었습니다. 당신이 오래전에 여왕을 죽여, 인형으로 조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 웃음에도 개의치 않고 차분히 말을 이어진 카스텔의 말에, 귀족들은 크게 술렁였다. 그럼에도 츠키에테는 동요하기는커녕,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텐미온의 왕자님께서 오랜만에 오셔서는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는 군요.”
“글쎄요. 농담인지 아닌지는, 조만간 저희 왕실의 마법사를 보내 검시해보도록 하지요.”
“우습군요. 하텐미온에서, 어떤 권리로 그리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런, 왕자님…….”

카스텔은 자신이야말로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츠메카린의 왕자님께서는 잊고 계신지도 모르나, 츠메카린과 하텐미온은 동맹국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내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받았지요. 물론, 츠메카린 역시 하텐미온에 그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정말로 현 여왕 폐하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그 시체를 인형으로 부리는 마법을 써 그간의 정세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했으며, 그간의 폭정을 배후에서 조정해온 것이라면, 이는 동맹국의 의리로서 묵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여왕을 폭군으로 만들어, 자신이 왕이 되는 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그간 사람들의 목숨을 해쳐왔다면……. 다시 말해, 그간 여왕이 저질러온 죄들이 전부 당신이 해온 일들이라면, 이는 동맹국의 왕족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규탄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비윤리적인 행위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츠메카린의 귀족 여러분들?”

귀족들은 수군거리기만 할 뿐 누구 하나 나서서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여전히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밀렌 백작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카스텔 왕자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허무맹랑한…….”
“허무맹랑한지 아닌지는, 조만간 저희 국에서 파견할 왕실 마법사가 알려주겠지요.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거기까지 말한 카스텔은, 고개를 돌려 여왕을 바라보았다.

“여왕 폐하께서 이런 망언을 들으시면서도 지금까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

당황한 츠키에테는 황급히 마나를 펼쳐 여왕에게 심어둔 마나의 실들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여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마나를 퍼부어도 마찬가지였다.
……약은 충분히 먹여두었을 텐데?

“……소용없습니다. 츠키에테 님.”

움직이지 않는 여왕을 노려보는 츠키에테의 등 뒤로, 아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츠키에테의 안색에 당황한 빛이 떠오르자 굳어있던 귀족들이 다시 한 번 크게 술렁였다. 그제야 카스텔의 말들을 실감한 모양이었다.

“……이럴 수가, 왕자님.”
“이게 모두 사실입니까? 그 동안 당신이 저희를 속여 왔다고요?”
“그렇다면 그간의 일들이 모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그 웅성거림을 깔고서, 카스텔의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 츠메카린의 왕자님. 이제 당신의 죄는 명백합니다. 이제 제가 츠메카린의 동맹국, 하텐미온의 제1왕자의 이름으로, 돌아가신 여왕 폐하와 그간 속고 있었던 츠메카린의 귀족과 백성을 대신해서, 당신에게 죄를 묻겠습니다.”

미동도 않고 굳어있던 츠키에테는 그 말에,

“……하!”

웃었다.

작게 울리던 그 소리는 점차 커져, 이윽고 거대한 홀에 메아리치며 울렸다.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 웃음소리에 카스텔은 눈썹을 찡그렸다. 귀족들은 더욱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웃던 츠키에테는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추더니,

“제 죄를 물으시겠다고요? 네. 좋습니다. 하텐미온의 왕자님. 아주 좋은 일이지요.”

두 손을 올려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귀족들 사이에 누군가가 나와 츠키에테에게 서류 뭉치를 건넸다.

“그런데 그 좋은 일을 하시기 전에, 우선 이것을 봐주시겠습니까?”

츠키에테의 손을 떠나 자신에게 건네진 서류를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카스텔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것은!”
“마음에 드십니까?”

츠키에테는 짐짓 친절해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성마대전 이후 왕국들이 하나씩 대마국에게 항복해가는 상황에서, 하텐미온은 대마국과의 협상을 시도했었죠. 도대체 어떤 방법을 취했는지는 모르지만 몇 번의 사절단이 오며가며 불가침 조약을 만들었고, 그에 따라 현재까지 하텐미온과 대마국, 하르타로스는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 같은 다른 왕국들도 이 정도의 평화를 지켜갈 수 있으니 고마운 일입니다마는…….”

잠시 운을 띠우다 츠키에테는 싱긋 웃었다.

“저로서는, 그 방법이라는 게 어떤 거였는지 궁금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조사를 조금 해봤습니다. 그것이, 그 결과입니다.”
“……이건…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뭐. 성마대전 이후의 긴 세월동안 철통처럼 지켜진 비밀인 것으로 압니다만, 알아내는 일이 제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래 뵈도 대마국에는 약간의 친분이 있어서요.”

홀에 들어서서 지금까지 쭉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해왔던 카스텔 왕자는 이제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워낙 얼굴에 차분한 표정이 박혀있어 사실은 날 때부터 저런 표정이었던 게 아닐까하는 의심까지 사고 있는 평소의 그와는 사뭇 다른 사람 같아 보일 정도였다.

반면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의 동요를 지켜보던 츠키에테는, 귀족들을 둘러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알고 싶으십니까? 루네스 에민카렌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이자, 루네스 에민카렌의 조율사라고 불리는 나라의 실체를?”
“……그, 그만! 말하지 말아주시오! 제발, 부탁이오!”

카스텔의 절박한 만류에, 츠키에테는 그저 조소로 응했다.

“무슨, 남의 비밀은 마음껏 떠벌려 놓으시고, 자신의 비밀은 지켜달라고요? 그래서야 공평하지 않죠.”

그리고 가차 없이 말을 이었다.

“매해 대마국에게 각지와 각 종족에서 뽑은 수만 명의 인간들을 바치기로 했더군요. 대마국에서 각 종족을 이용해 온갖 실험을 하고 있다는 말은 익히 들었습니다. 거기에 쓰일 재료인가 보죠? 성마대전 이후, 매년 쭉 수만 명이라는 숫자를 바쳤다…. 그 시체를 쌓으면 얼마나 높은 산이 될지, 저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만……. 그간 여왕이 죽여 온 처녀의 숫자 따위는 우스울 정도라는 것만은 알겠군요. 뭐, 이해합니다. 수만 명의 목숨과 하텐미온의 전 백성들의 목숨. 양쪽을 저울질해서 내린,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로군요. 이 이야기가 전 대륙에 퍼진다면, 하텐미온이라는 나라의 위상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하텐미온의 왕자님?”

새하얗게 질린 카스텔의 얼굴을 바라보며, 츠키에테는 쿡쿡 웃었다.

“자, 하텐미온의 왕자님. 그러니 당신은 여기서 또 하나의 밀약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신 조국의 위상과 제 위상을 위해서요. 당신은 여기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아니, 오히려 증인이 되어주시는 겁니다. 성에서 내쳐졌던 왕자가 돌아와 사악한 마녀를 무찌르고, 나라의 새로운 왕이 된 미담의 증인이요. 아, 그저 목격자가 싫으시다면 도와주셨다고 해도 좋겠군요. 왕자가 마녀를 무찌르다 어려움에 처하자 마침 지나가던 이웃 나라의 왕자가 그를 도왔다…. 천민들이 좋아할 만한 극적인 상황 아닙니까? 저는 마음에 드는군요. 하텐미온의 왕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저는…!”

카스텔이 차마 대답을 잇지 못한 채 탄식하며 고개를 떨어트리자, 그때까지 충격 받은 표정으로 사태를 지켜보기만 하던 밀렌 백작이 분개하며 외쳤다.

“하지만 왕자님! 저희 귀족들은 당신의 악행을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겁니다!!”
“……악행? 어떤 악행 말이지?”
“그야, 여왕 폐하를 살해하고!”
“……살해?”

츠키에테의 얼굴에서 싸늘한 조소가 흘렀다.

“방금까지, 여왕을 죽이라고 간청했던 것은 분명히 그대들이었을 텐데?”

순간, 귀족들 사이로 얼어붙을 듯한 정적이 번졌다.

“재미있군. 밀렌 백작. 원한다면 그대가 아까 했던 말들을 단어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 읊어줄 수도 있어. 물론, 동의를 했던 이들의 이름도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외워줄 수 있지. 아. 설마 방관했던 자들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것도 다 외워줄 수 있어. 그대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야.”
“…….”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은커녕, 홀에는 이제 작은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다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 무섭도록 차가운 정적에 짓눌려 있었다. 오직 츠키에테만이 그 정적을 즐기며, 보란 듯이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정적이 흐른 끝에 그를 깨고 한탄하듯이 말한 것은 아셀이었다.

“……예상하고 계셨군요. 제가 이렇게 나올 것을,”

미소를 거둔 츠키에테가 그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짧게 대꾸했다.

“그래.”
“……도대체 어떻게…….”
“네가 나를 끝까지 받들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어. 언젠가는 배신하리라 여겼지. 그저 그때까지만 이용하자고 생각했어. 의심스럽다고 버리기엔 써먹을 구석이 많았거든. 모처럼 유능한데, 아깝잖나. 네가 취할 배신의 방법도 충분히 예상이 갔지. 지위도 별 것 아니고 배후에 아무것도 없는 네게 귀족들이 지지를 하겠나, 기사단들이 휘하에 들어가 주겠나? 결국 남은 것은, 동맹국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수밖에 없지.”
“……당신이라는 사람은!”

아셀은 분노하려다, 입술을 깨물었다.

“배신하는 사람이 나쁜 거지.”

츠키에테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하더니, 조소를 걷어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100%로 자네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 예측했던 건 아니었어. 나는 그저 대비를 해뒀을 뿐이야. 기왕이면 이용도 해먹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용?”
“어차피 동맹국끼리는 후계자 임명식이나 즉위식 때 서로의 왕족을 증인으로 보낸다는 조항이 있었지? 증인이 없다면 상대국의 왕위 계승자를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내정 권한까지 두 왕실은 주고받았어. 하지만 그 증인을 공식적으로 불렀다는 사실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면 모처럼의 미담에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겠나? 그게 조금 염려스러웠는데, 자네가 잘 해주었지. 이렇게 하텐미온의 왕자를 몰래 불러주다니,”

메마른 웃음소리가 울렸다. 마치,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처럼.

“……당했군요.”

아셀의 힘없는 중얼거림이 메마른 바람처럼 그 웃음소리 속에 섞여들었다.
아름답고 거대한 홀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있는데도, 그곳에는 죽은 듯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하텐미온의 왕자도, 츠메카린의 귀족들도, 이미 오래전에 죽은 여왕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 살아있는 시체들을 둘러보며, 츠키에테는 비웃듯이 말했다.

“다들 그렇게 굳어 있을 필요 없어. 말했잖아? 오늘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어. 당신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야. 임명식은 순조롭게 거행되었고, 공교롭게도 임명식을 끝낸 여왕은 급환으로 쓰러져 숨졌다. 그리하여 임명식은 그대로 즉위식이 되었고, 곧바로 내가 이 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렇게 기억해두게. 그렇게만 해준다면, 여왕을 조정할 때처럼 폭정만은 하지 않아 주지. 꽤 괜찮은 조건이잖아?”

그렇게 말하고 다시 웃어대던 츠키에테가 돌연 웃음을 거두고는, 싸늘히 아셀을 노려보았다.

“허나, 반역자는 처단해야지. 저 자를 잡아서 끌고 가도록.”

주변의 기사들이 아셀을 향해 검을 겨누는 것을 보며, 츠키에테는 등을 돌렸다.
짙은 조소가 그의 얼굴에 맺혀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계산 대로였다. 이제 검은 킹은 검은 옷을 입고 있던 하얀 기사와 껍데기에 불과했던 퀸을 죽이고, 체크메이트를 외치고 승리자가 되면 됐었다. 그는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가 미처 보지 못했던, 단 하나의 말이 아니었다면.

―챙.
홀을 울리는 날카롭고 예리한 소리에 츠키에테는 놀라 등을 돌렸다. 아셀에게 검을 겨누었던 기사와 아셀 옆에 있던 기사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직 당신의 승리는 아닙니다.”

또렷이 울린 아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홀 가운데를 긋고 있는 푸른 융단을 경계로 기사들이 대치하는 동시에 몇몇 귀족들이 빠져나가 아셀의 편에 섰다. 츠키에테는 눈살을 찌푸리며 융단 너머를 바라보았다.

“……모두, 이 자를 지지한다는 건가?”

아까 밀렌 백작이 여왕을 죽여 달라 간청할 때나 갑자기 나타난 카스텔 왕자가 츠키에테가 규탄할 때, 그리고 츠키에테가 그와 귀족들을 협박할 때 소리도 표정도 없이 그 자리에 서있어 이상하다 여겼던 귀족들은 모조리 그쪽에 서있었다.

“지위도 별 것 아니고 배후에 아무것도 없는 네게, 지지를 보낸 귀족이나 휘하에 들어간 기사단이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 많이?”

츠키에테가 그렇게 말하는 도중에도 아셀 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점점 불어났다. 이제 그곳에 서있는 것은 홀을 메우고 있던 이들의 반에 가까운 수였다.

“……건방진 것들.”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던 츠키에테가 이를 으득 갈았다.

“이미 여왕은 죽었어. 어차피 이 나라의 왕이 될 자는 나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하고 있는 짓은 반역이 아닌가?”

그 말에, 몇몇 귀족들이 술렁였으나,

“아니, 당신이 아니지요. 츠키에테 님.”

아셀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죽은 여왕을 옥좌에 앉혀두고 통치를 시킬 셈인가? 아니면, 네가 섭정이라도 할 텐가?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왕이라도 될 셈인가?”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아셀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저도 아닙니다. 기억해내십시오.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여왕의 옥좌가 드리운 어둠이 움직이며,

“당신보다 훨씬 고결하고 정당한, 진짜 ‘자격’을 지닌 후계자가.”

그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늘 침대 위에 머물던 가느다란 발목을 푸른 융단 위에 내딛고, 늘 입던 하얀 원피스 대신 무거워 보이는 암청색 천에 검은 레이스가 둘린 드레스를 입고, 등을 곧게 펴고 서서 가느다란 은빛 레이피어를 손에 든,

“……………츠뮤?”

츠뮤였다.

츠키에테는 아연히 츠뮤를 바라보다, 한참 만에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생전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뭔가를 잘 못 본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츠뮤는 그가 결코 잘못 듣게 하지 않겠다는 듯, 또렷이 그를 향해 말했다.

“그만 포기하세요. 오라버니.”

늘 수줍게 미소를 띠우곤 하던 그 입술이 싸늘한 선을 긋더니, 그 사이로 믿을 수 없는 말을 흘러보낸다.

“이쯤에서 포기하신다면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목숨만은 살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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